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지난 11월 하순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이 편견을 가지고 이단시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피파를 겨냥한 이집트 최악의 테러를 감행해 지구촌을 경악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피는 유태교의 랍비나 선종(禪宗)의 선사(禪師)에 걸맞는 역량을 갖춘 수피즘의 영적 스승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종교를 초월해 자기성찰에 매우 요긴한 수피의 기도문 하나와 이와 맞닿아 있는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오늘이 인생의 전부’라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 몇 편의 저의 애송시 및 이의 실천에 관한 사례로서 저의 일상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 나 먼저 바꾸기

먼저 종교를 초월해 지구촌 이웃들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수피 바야지드 바스타미(804-874)의 간결한 ‘나 먼저 바꾸기’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년이 되었을 때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된 지금 나는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이 기도를 드렸다면 아마 내 인생은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기도문은 종교를 초월해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묻힌 성공회의 한 주교 묘비명에 활용되며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 ‘오늘’ 관련 애송시

그런데 사실 ‘나 자신의 변화’는 하루하루 일상의 삶 속에서 향상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어갈 때만이 가능한 일이기에, 시인들의 독특한 개성에 따라 각기 그 표현은 다르지만 ‘오늘이 인생의 전부’라는 지혜를 깨우쳐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시들을 함께 새기고자 합니다.
먼저 윤동주 시인께서 1934년 12월에 지은, ‘(어린 마음에 물은) 내일은 없다’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일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
두 번째로 구상具常 시인께서 지은,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세 번째로 이해인 수녀 시인께서 지은, ‘어떤 결심’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었으며 날마다 눈뜨자마자 염송하는, 종교를 초월해 누구나 날마다 실천 가능한 ‘신사홍서원(新四弘誓願)’을 소개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날마다 한가지 선행(善行)을 행하오리다./ 날마다 한가지 집착(執着)을 버리오리다./ 날마다 한구절 법문(法門)[영적 스승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익히오리다./ 날마다 한차례 화두話頭[자기성찰의 주제]를 살피오리다.”

◇ 습관의 힘

위와 같은 마음자세로 ‘오늘’을 철저히 살기위해서는 습관화가 필수이기에 습관의 위력을 드러내는 두 가지 사례를 들고자 합니다. 먼저 학자에 관한 사례입니다. 절친한 동료 교수 가운데 메릴랜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학위과정에 있을 때 주말도 없이 연구실로 출근할 때마다 주차장에서 늘 공대 한국인 교수님과 마주쳐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어느 날은 하도 궁금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이미 정교수이신데 왜 아직도 주말도 없이 연구실에 나오시는지요?” 그러자 교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셨다고 합니다. “계약직인 조교수 시절에는 정규직인 부교수로 승진하기 위해 온힘을 다해 연구에 매진했었네./ 부교수 승진 후에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걸고 정교수 승진에 매진했었네./ 그런데 정교수 승진 후에는 습관이 되어서 주말이라는 생각도 없이 출근하고 있다네.”
두 번째는 종교인에 관한 사례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의 메리 수녀는 101세까지 장수하시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상적인 인지 능력을 유지하며 존경받는 수녀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사후 부검 결과 뇌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서 이미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런 사례들에 주목하여 알츠하이머병 전문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이 병에 걸렸더라도 매일 평소 습관대로 꾸준히 생활할 경우 뇌 손상 여부에 관계없이 정상적인 인지 능력을 평생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습관화된 나의 일상

처음 선 수행을 시작할 무렵의 저와 지금의 저를 비교해 보니 비록 하루하루가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았으나 지금 뒤돌아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선가(禪家)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끊어져 지나갔으나 이제는 하루하루가 이어져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975년 10월부터 참선 수행을 시작해 10년이 지날 무렵 온전히 습관화된 이후, ‘오늘이 인생의 전부’라는 마음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저의 일상日常에 대해 소개드리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납니다. 일어나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방석을 끌어 당겨 다리를 틀고 앉습니다. 물론 처음 몇 개월은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울리는 시계에 의존하여 의식적인 노력을 하고난 후의 일입니다. (신)사홍서원과 몇 가지 기도문을 새기며 한 십 여분 있노라면 멍하던 정신도 맑아져 오고 그런 후에 화두를 들고 한 시간 정도 참선을 합니다. 그리고는 마칠 무렵 하루의 일과를 차분히 생각하며 그날 가장 시급한 일들이 무엇인가를 속으로 다짐해 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때 들고 있는 화두, 심지어는 나조차 놓아 버리면 버릴수록 그날 하루 일과는 다른 어느 날 보다 더 중심이 잡혀 있음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참선이 끝나면 나의 본업인 연구를 하러 학교에 갑니다. 선가에 입문하기 전에는 그저 막연히 학문을 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다녔으나 이제는 적어도 제 경우에 있어서는 학문과 삶의 뜻이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삶의 태도에 비추어 볼 때 학문이란 대상 자체는 좋다 나쁘다 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더 나아가 학자, 농부, 기술자, 전업주부 등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비교할 그 무엇도 없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자기 길을 얼마나 성실히 걸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철저히 농부로서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참고로 요즈음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맡은 바 전문직에 종사하는 일과 수행이 결코 둘이 아니다’라는 뜻을 가진 ‘생수불이(生修不二)’라는 사자성어를 통해 이런 정신을 널리 제창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나의 하루로 돌아가 물리학 교수로서 학교에서 교육과 연구에 열중하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올 때 화두를 들며 밖에서의 일들을 하나씩 비워갑니다. 집에 도착할 때는 한결 차분한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의 하루가 거의 끝나갑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는 것에 비해서 또 다른 사람보다 일찍 잡니다. 잠자기 전 먼저 십 여 분 간 하루의 중심이 얼마나 흐트러졌는가를 반성한 다음, 그후 화두를 들며 한 시간 정도 참선을 하고 내일을 위해 조용히 눕습니다.”

이것이 저의 하루이며 지금까지 계속 반복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단순한 반복일지 모르나 저에게 있어서는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아니 순간순간이 새롭습니다. 사실 저 자신이 너무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2017년 12월 마지막 달에 올 한 해 동안 하루하루의 연속인 ‘오늘’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종교를 초월해 냉철하게 돌아보시면서, 이런 삶의 태도를 자신에 알맞게 습관화하시며 2018년 새해부터는 더욱 멋진 인생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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