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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의 ‘숏컷’] 안희정의 선택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안희정 지사가 충남도지사 3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수한 정치적 소음을 뚫고 당도한 새로운 신호입니다. 새로운 도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도리라고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단박에 깊은 성찰이 느껴집니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스스로에게 던졌을 무수한 질문들도 보이는 듯합니다. 대선 경선에 나섰다가 패배한 정치인의 단단한 의지도 읽힙니다. 패배는 아프지만 패배를 통해 성장하는 정치인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도지사 3선이 거의 확실한 정치 지도자의 불출마선언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질문의 위대한 힘

성찰의 힘은 질문에서 나옵니다. 대답이나 해법이나 비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전진을 이끌 것인가. 모든 질문은 고독합니다. 자신의 가슴 안에 빈 공간을 마련해야 진짜 질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확신을 거부하는 힘입니다. 특히 나만 옳다는 확신, 우리만 옳다는 확신은 질문을 섬멸합니다. 증오는 확신의 그림자입니다. 분노는 질문을 포함하지만 증오는 질문을 배격합니다. 분노는 불의를 향해 있고 투쟁을 통해 그것을 바꾸지만 증오는 히틀러가 유태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학살과 조롱으로 이어집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노와 투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일 수 있습니다. 이는 평화적인 촛불시위가 증명했습니다. 증오와 조롱은 상대방을 섬멸시키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증오와 조롱을 일삼는 자유한국당의 현재 모습이 그렇습니다. 협치와 연정은 가장 평화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의 전술입니다.

증오와 조롱을 넘어서자

우리는 분노와 투쟁, 증오와 조롱, 협치와 연정이 갖는 차이를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혁신할 때 국민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2012년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청년문제, 복지 같은 진보적 이슈와 새로운 인물을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역시 인재영입과 뉴미디어 활용이라는 혁신전략으로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박근혜 정부 하에서 청와대 출장소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을 대의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장기집권을 꿈꿨습니다. 유능하지도 깨끗하지도 혁신적이지도 않은 보수는 극단적인 철퇴를 맞았죠. 그런데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을 적으로 대합니다.

“나는 모르겠어!”

혁신의 요체는 낡은 과거를 의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질문하는 힘입니다. 폴란드의 위대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이 질문의 힘을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그는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단어엔 작지만 견고한 날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날개는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자체를 폭넓게 만들어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모르겠어”를 반대로 하면 “나는 모든 것을 알아”일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 벌어지니까요. 특히 이 엄청난 기술혁명의 시대에 무엇인들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스마트폰 시대는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치명적 약점을 드러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으로 텍스트를 ‘스캔’하듯 흡수합니다. 이는 자신이 믿고싶은 것만 믿게 하는 확증편향을 강화합니다. 팩트조차 제대로 확인할 여력이 없습니다. 확증편향은 극화된 팬덤현상으로 이어집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갖습니다.

스스로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열정도 사그라듭니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스스로의 존재도 잊혀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해지죠. 불안함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불안함에 안주하면 급기야 ‘내’가 사라지고 ‘다름’을 ‘적’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존재를 빛나게 해주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위한 새로운 도전

지금 많은 정치인들은 질문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상처받고 고통 받는 약자들의 아픔을 너무 쉽게 외면합니다. 눈앞의 권력에 도전할 뿐 세상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청와대가 낙태죄 폐지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요구해도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조차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낡고 스러져가는 교회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정치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캠페인 공약으로 내건 동성결혼 합법화는 그 이후 미국을 비롯한 뉴질랜드, 대만 등 많은 국가에서 합법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심지어 필리핀의 독재자 두테르테도 동성결혼 합법화를 선언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필리핀은 가톨릭이 우세한 국가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동성결혼은커녕 동성애 공론화조차 두려워합니다. 여성 문제는 더욱 기가 막힙니다. 세계경제포럼이 한국의 성평등지수가 118위라고 발표해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는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여성가족부는 낡은 교회권력의 압력에 굴복해 ‘성평등’을 버리고 ‘양성평등’으로 후퇴했습니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들은 보수의 문제도 진보의 문제도 아닌 바로 인간의 문제입니다. 오랜 기간 억압받고 고통받아온 사회적 약자의 문제입니다. 일부 낡은 교회권력의 압력에 굴복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닙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닙니다. 비겁이고 졸렬입니다. 차별금지는 이미 상식이 된 인류애의 귀결입니다.

얘기가 많이 돌았습니다.

안희정의 선택은 안희정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용기이고 도전입니다. 2017년 연말에 도착한 이 새로운 신호가 정치권에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가차 없는 행동의 전염성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정치인들의 새로운 질문이 시작되기 바랍니다. 눈앞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넘어 세상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안희정의 선택이 인류애를 향한 공적모험에 용기 있게 나서는 정치인이 더 많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시사위크  sisaweek@sisa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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