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내가 언젠가 《한비자 韓非子》의 <외저설좌상>에 나오는 ‘화숙최난(畫孰最難)’이란 사자성어를 말한 적이 있지? 오늘 다시 되새겨 보세. 제나라 왕이 “무슨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가?”라고 묻자 식객이었던 화가가 “개와 말”이라고 대답하네. 그러자 왕이 다시 무슨 그림이 가장 쉬운가를 묻자, 화가는 “귀신”이라고 대답하지. 왕이 그 이유를 묻자, 개와 말은 사람들이 날마다 보는 것이니 똑같이 그려야 해서 어렵고, 귀신은 형체도 없고 직접 본 사람도 없어 아무렇게나 그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화가가 대답하네. 어떻게 그리든 누가 나서서 귀신이 아니라고 증명할 사람이 없으니 그리기가 가장 쉽다는 거야.

내가 왜 다시 ‘귀신’ 이야기로 시작하는지 짐작이 가는가? 근래 이 나라의 제1야당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저 화가의 ‘귀신’ 그림처럼 얼른 형상화하기 어렵기 때문일세. 얼마 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사회주의 예산 반대’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네. OECD 회원국 중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사회주의 예산’이라니…… 그 당의 홍준표 대표도 최고위원회에서 “통과된 사회주의식 예산은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에 아주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고, 일자리나 경제성장이나 국민복지에 어려운 환경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 당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뭘까? 아동수당 도입, 기초노령연금 인상, 공무원 인력 충원 등이 ‘사회주의식’ 정책이란 말인가? 그들 말대로라면 OECD 국가들 거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내 상식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뭔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네. 그러니 ‘귀신’이야기를 또 할 수밖에. 그 당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내가 혹시 시대에 뒤진 노인은 아닌지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네.

이왕 정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은 계속 우리 정치에 관해 말해보세.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일자리는 줄어드는 시대, 고령화로 노인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초저출산으로 생산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과제가 뭘까? 세계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외계층, 즉 노동자와 농민, 노인, 일자리를 갖지 못하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청년들을 도와주는 게 우리 정치의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그러려면 복지 확충을 위해 지출하는 예산의 비중을 늘려야 하는 건 당연하고. 내년 예산의 실체를 꼼꼼히 살펴보면 올해보다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아닌데, 그걸 가지고 ‘사회주의 예산’이라고 철 지난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고 하다니… 그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네.

이달 초 홍준표 대표가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전 세계가 보수 우파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탄핵사태가 벌어지면서 좌파 광풍 시대를 이어가고 있는데, 이 좌파 광풍 시대가 오래가진 않을 것으로 본다. 당 혁신을 통해 그때를 대비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더군. 여기서도 나는 또 ‘좌파 광풍 시대’라는 대한민국 극우들의 ‘귀신’을 보네.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이른바 ‘좌파’가 가장 미약한 나라거든. 제대로 된 ‘진짜’ 진보정당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선거제도를 그대로 놔둔 채 ‘좌파 광풍’을 말하는 것을 보면 그분 엄살이 대단하네. 엄살이 아니면, 대다수 국민들을 우습게보고 헛소리하고 있는 거지. 이 나라에 유럽식 좌파에 가까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어쩌면 동양식 보수정치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맹자도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즉 남의 불행에 대해 차마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인 인정(仁政)을 중요시했네. 어떤 이유에서든 억울한 일을 겪고 있거나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게 인정의 요체라고 말했어. 게다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즉 인정(人情) 그 자체야. 불쌍한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고 동정심 없이 매몰차게 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인정머리 없다’고 비난하네. 정당도 마찬가지야. 사람 죽이는 무기를 사거나 만드는 데는 펑펑 쓰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쓰는 돈은 ‘사회주의 예산’이라고 낙인을 찍는 정당은 측은지심이 없는 정당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수밖에 없어. 자유한국당이 중산층을 포함한 보수세력들의 지지를 받는 우파 정당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자기들만 알아보는 ‘귀신’을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되지. 그들에게 주역에 나오는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이라는 한 문장만 들려주고 마치고 싶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뜻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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