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2017년, 재벌가의 희비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파사현정(破邪顯正).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다. 대학교수들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다.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듯 2017년 대한민국은 큰 변혁을 맞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됐고, 권력의 정점에 있던 많은 이들이 치부를 드러내며 구속됐다. 이어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하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한축이자 적폐청산 핵심 대상으로 지목됐던 재벌 역시 2017년의 ‘파사현정’을 피하지 못했다. 그 속에서 표정이 극명하게 엇갈린 재계다. 각 재벌가의 2017년을 돌아본다.

이재용 부회장은 2월 17일 이후 내내 구치소에 머물고 있다. <뉴시스>

◇ 삼성家 -깨져버린 ‘그릇된 것’

‘파사현정’에서 앞의 두 글자 ‘파사’의 대상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자신의 승계를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됐고,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건희 회장 일가 최초의 구속이자 징역살이다.

병상에 있는 이건희 회장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과거 적발된 차명계좌에 대해 과세 및 과징금 부과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추가 차명계좌까지 발견됐다. 이재용 부회장처럼 구속 및 실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은 낮지만, 대규모 과세 및 과징금 부과는 적극 추진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그룹은 기록적인 실적을 달성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 속에 3분기까지 23조5,980억원의 누적 영업이익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 마냥 달갑기 만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재벌들의 주요 면책사유였던 ‘경제적 영향’을 주장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에게 2017년은 ‘파사’였다. 2018년 새해엔 ‘현정’이 필요하다.

◇ 현대차家 -더 깊어진 경영고민

현대차그룹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비교적 덜 연루됐다. 이점은 다행이지만, 실적 고민은 더욱 늘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또 다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11월까지 총 누적판매량을 보면, 현대차는 6.1%, 기아차는 7.8%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중국 등 해외시장 성적이 좋지 않았다. 제네시스 브랜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중국발 악재가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다.

이런 가운데, 노조와의 힘겨루기는 갈수록 버거워지는 모양새다.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현대차와 기아차 모두 임단협이 해를 넘길 위기에 처했다. 통상임금 소송, 비정규직 문제 등에 따른 부담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아직 숙제로 남아있는 승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한층 어려워졌다. 일감 몰아주기, 지배구조 개편 등 해결해야할 문제가 적지 않은 가운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눈초리는 매섭기만 하다.

◇ SK家 -최태원 회장의 상반된 행보

SK그룹은 삼성그룹, 롯데그룹과 함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가장 깊숙이 개입된 곳 중 하나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특별사면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은 기소를 면했다. 다만, 최근에도 과거 보수단체에 지원금을 건넨 정황이 포착되는 등 SK그룹을 향한 눈초리는 여전히 곱지 않다.

최태원 회장 개인적으로는 이혼 절차가 본격 시작됐다. 이혼에 대한 최태원 회장 본인의 의지가 상당하지만, 그 과정 및 이후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실적에 있어서는 역시 반도체 호황 효과를 톡톡히 봤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와 비교해 매출이 2배가량 증가했고,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그보다 놀라운 상승세를 보였다. 아울러 최태원 회장의 다양한 실험적 경영행보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가정법원에 들어서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모습. <뉴시스>

◇ LG家 -‘파사현정의 정석’, 새 시대 모범생 등극

‘정도경영’이 빛을 봤다. 삼성이 ‘파사’였다면, LG는 ‘현정’이었다.

LG그룹은 새 정부에서 ‘모범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김상조 위원장은 지배구조 등에 있어 LG그룹을 모범사례로 꼽았고,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협력상생의 모범기업”이라고 칭찬했다. LG그룹은 마지막 퍼즐이었던 LG상사를 지주회사 체제하에 편입시키며 다시 한 번 정도를 걸었다.

실적도 준수했다.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이 기대되는 가운데, 주가도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이와 함께 총 직원 수도 가장 크게 증가하며 일자리 창출 부문에서도 모범생이 됐다.

올해 모든 것이 좋았던 LG그룹이다.

◇ 롯데家 -법원이 집무실? “바쁘다 바빠”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 다음으로 좋지 않았던 신동빈 회장과 롯데그룹이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만 두 개의 재판에 기소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재판과 온 가족이 기소된 비리혐의 재판 등이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법정을 오가느라 분주한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한숨을 돌린 것은 지난 22일 경영비리 혐의와 관련해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다.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징역 1년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적절하다”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판결문 내용도 있어 여론이 썩 좋지 않다.

신동빈 회장은 재판으로 바쁜 와중에도 ‘혁신경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롯데월드타워가 마침내 개장했고, 50주년을 맞아 ‘뉴 롯데’를 선언했다. 지주사 체제 전환으로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스스로 ‘파사’에 나선 신동빈 회장과 롯데그룹의 행보였다.

하지만 내년에도 ‘고난의 행군’은 계속될 전망이다. 당장 1월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루 관련 선고가 기다리고 있다. 최근엔 롯데월드타워 특혜 의혹까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양상이다. 첩첩산중이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 유독 자주 법원을 드나들었다. <뉴시스>

◇ GS家 -잘 나가는 사촌 때문에…

한 울타리였던 LG그룹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먼저,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전경련의 수장으로서 위상에 금이 갔다. 전경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깊이 연루되며 거센 해체 요구를 받았고, 현재는 규모나 입지가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허창수 회장은 마땅한 후임을 찾지 못해 여전히 회장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GS그룹 차원에서는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부담이 상당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당 계열사들은 높은 수준의 내부거래를 유지하며 개선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선제적 조치에 나선 LG그룹과 비교된다. LG그룹이 ‘모범생’이었다면 GS그룹은 대표적 ‘문제아’로 조명 받았다.

◇ 한화家 -재벌 갑질의 아이콘

고질병이 또 터졌다. 좀처럼 ‘파사현정’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한화그룹은 승마협회 회장사 자리를 삼성그룹으로 넘기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유라 말 지원 등에 연루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관계자가 기소까지 되는 일은 피한 한화그룹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정유라와 함께 승마를 했던 3남 김동선 씨가 또 다시 ‘재벌 갑질’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최종적으로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나, 한화그룹 오너일가의 이미지는 되돌리기 힘든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파사현정’이란 말의 의미를 두고두고 새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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