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황소 동상.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반목했던 월가는 현재 백악관 경제요직 상당수에 진출해있다. 한편 미국 첨단산업계를 대표하는 실리콘 밸리는 아직까지 반목 중이다.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언론인 마이크 울프가 출판할 자서전의 내용 일부가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화염과 분노’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자서전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 수석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과의 인터뷰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의 오른팔로 불리던 인물인 만큼 대통령 일가를 둘러싼 사적인 폭로가 많았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방카 트럼프의 야욕이나 취임식에 대한 대통령의 불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백악관과 월스트리트·실리콘 밸리의 마찰이야말로 배넌의 폭로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둘 모두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사이가 틀어진 대표적인 지역들이다. 미국 금융과 첨단산업의 중심지가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던 셈이다.

◇ 폐쇄성과 개방성의 대립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산업단지인 실리콘 밸리는 지난 2016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힐러리의 편을 들었다. 캘리포니아 주 전체에서 61.73%의 득표율을 기록해 55명의 선거인단을 얻어낸 힐러리 클린턴은 실리콘 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만 85.04%의 지지를 받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한 비율은? 단 9.29%였다. 롬니·매케인·부시 등 전 공화당 후보들과 비교해도 처참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울프의 저서에서 지목된 트럼프와 실리콘 밸리 간 갈등의 핵심은 ‘전문직 단기취업(H-1B) 비자'다. 화학·건축·수학·사회과학 등 전문직종의 외국인근로자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는 ’미국 기업은 미국인을 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실직한 미국인 IT종사자들을 초청해 미국인의 실업 문제를 공론화했으며, 대선 공약으로 H-1B 비자 제도의 전면 수정을 내걸었다. 전 세계에서 전문 인력을 끌어 모아온 초국적기업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현재 공개된 울프의 자서전 일부 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유명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과의 통화에서 실리콘 밸리와의 관계를 개선하러 나설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머독의 조언은 H-1B 비자 이슈에 대해 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독은 국경장벽을 쌓고 보호무역 수위를 높이겠다는 트럼프의 대외정책과 미국 이민시장의 문을 더 열어야 한다는 자신의 조언이 상충될 것을 염려했지만, 울프는 “트럼프는 무심히 ‘우리가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고, 머독은 전화를 끊으며 ‘멍청한 놈’이라고 중얼거렸다”고 썼다.

작년 4월, 미국 이민국은 모든 H-1B 비자 발급 프리미엄 서비스를 일지 중단할 것을 선언했다. 이 조치가 해제되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통해 비자발급심사를 강화했으며,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작년 1~8월 동안 신청된 H-1B 비자 중 25% 가량이 반려됐다.

그 자신이 기업가인 트럼프 대통령이 산업계의 생리를 모르지는 않을 터다. BBC는 트럼프와 머독의 대화를 두고 “대통령 본인의 회사도 자주 외국인 노동력에 의지했는데, 그의 반 이주노동자 정책과 기업인으로서의 트럼프 사이엔 괴리감이 크다”고 단평했다. BBC는 대통령 당선이 특별한 심적 변화를 가져왔거나 혹은 주위 의견에 쉽사리 휩쓸리는 그의 성격이 발현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 월가와 손잡은 트럼프… ‘갑’은 누구

‘트럼프 헤이터’로 따지면 런던과 함께 세계 금융의 양대 중심지로 손꼽히는 월스트리트도 밀리지 않는다. 민주당의 텃밭인 뉴욕 주는 지난 대선에서 59.01%가 힐러리를 지지했는데, 이 중에서도 맨해튼의 86.56%는 독보적인 수치다.

철강·자동차 등 전통적 제조업계가 주 지지층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월스트리트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그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지 않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뉴욕 주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지내며 재계 인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힐러리 클린턴 또한 주요 표적 중 하나였다.

취임 후 트럼프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개혁안인 도드-프랭크법보다 규제수준이 훨씬 완화된 ‘금융선택법’이 작년 6월 하원을 통과했으며,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법안도 무사히 빛을 봤다. 한때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강한 비난을 받았던 골드만삭스그룹은 이제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과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등 다수의 행정부 인사들을 배출한 요람이 됐다. ‘월스트리트와 친해지지 않을 미국 대통령은 없다’는 격언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인 셈이다.

또 다른 골드만삭스 출신의 행정부 요원이었던 스티브 배넌이 울프의 자서전에 폭로한 내용들에는 한 가지 일관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으며, 백악관과 미국 기업계의 역학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 해 40년 만에 가장 높은 참모 교체율 기록을 세웠으며, 빈자리 중 상당수는 월스트리트 출신들이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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