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17도를 기록한 지난 26일,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마침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됐다. 예정된 수순이긴 하지만 MB에게는 금명간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질 것이고, 어쩌면 평창올림픽 개막식(2월 9일) 이전에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이날을 고비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검찰은 MB의 혐의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26일 새벽까지 서초동 법원 앞 영포빌딩에 있는 MB소유의 청계재단을 압수수색했고, 국정원 특활비 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MB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도 오전 10시경 병원입원 상태에서 검찰에 나와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MB를 전격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한 것은 그동안 주변 인물들로부터 결정적인 증언과 물증을 충분히 확보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MB의 검찰출석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MB는 자신을 둘러싼 그 많은 의혹 가운데 하나도 사실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있다는 논리만을 줄곧 내세웠다. 전형적인 ‘희생양 프레임’(scape-goat frame)이다. 무조건 ‘정치보복’이니 ‘보수궤멸’이니 하며 강변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그가 정치보복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자신이 청와대 있을 때 전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치보복 했었다는 사실을 먼저 실토해야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MB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는 전임자가 청와대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노무현 죽이기에 곧바로 착수했다. 세무조사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줄줄이 이어졌다. 일종의 망신주기 전략이었다.
 
부산상고 동문이 하는 사업체를 샅샅이 털고 노무현의 정치 후원자였던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과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 등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자주 다니던 단골 식당까지도 세무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와 박연차 회장, 정상문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을 전격 구속시켰다. 권양숙 여사도 검찰에 불려갔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100만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였다. 돈의 행방을 찾는다며 외국에 나가 있던 아들 노건호 씨도 불렀는데, 달리는 승용차를 추적하고 그 모습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두고두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른바 ‘논두렁 시계’는 이명박의 국정원과 검찰의 합작품으로 밝혀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회갑 때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고가의 시계를 권양숙 여사가 논두렁에 내다 버렸다며 이를 희화화했다. 사람들은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고 소문은 급속도로 확산됐다. 그들이 노린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정치적인 대응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사법적인 대응으로 맞섰다.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밝히며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고군분투(孤軍奮鬪), 처음부터 외로운 싸움이었다.

2007년 12월 18일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48.67%의 득표율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530만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 일주일 후쯤 MB는 당선인 신분으로 청와대를 방문, 퇴임을 앞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진정성 없는 빈말이었다.
 
MB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청와대 기록물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MB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재임 중 자신의 기록물을 복사해 가도 좋다는 양해를 받았음에도 MB는 나중에 딴 소리를 해 버려 일이 복잡하게 얽히게 됐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줄을 죄는 서막일 뿐이었다.

그가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교체에 따른 이념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종로 출마 당시 경쟁자 시절부터 쌓인 해묵은 감정 때문인가?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MB가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취임 초부터 고작 52%의 지지율 밖에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김영삼(YS)·김대중(DJ)·노무현 대통령 등은 취임 초 한결같이 70%를 웃돌았다. YS 70.0%, DJ 80.3%, 노무현 75.1%와 비교하면 52%는 전례 없이 낮은 지지율이었다.

그런 가운데 2008년 5월, 취임한지 100일도 안 된 시점에서 MB는 광우병 촛불시위에 따른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전국적으로 확산돼 가던 시위는 단순히 광우병 소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상 MB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의 성격이 짙었다. 첫걸음부터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재임 중 최고 지지율도 취임초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또한 전례 없는 일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YS가 87.3%, DJ가 81.3%, 노무현이 87.8%로 모두 80% 이상 고공행진을 한 데 반해 MB의 최고치(52%)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임기 말에는 누구나 지지율이 추락하게 마련이지만 MB도 예외는 아니었다. DJ가 37.7%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노무현(27.9%), MB(26.6%), YS(14.0%) 순이었다. 반면 임기 중 최저치는 DJ(30.6%), MB(15.2%), YS(14.0%), 노무현(12.6%) 순으로 나타났다.
 
MB는 자신의 지지율이 최저치를 찍을 때 독도방문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내들었다. 한·일관계가 꼬이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독도방문 직후 지지율이 60%대로 껑충 뛰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취임초기 MB의 초라한 지지율과 달리 경남 고향에 내려가 밀짚모자에 자전거를 타고 농민들과 생활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낙향한 전임 대통령을 만나려는 방문객들이 줄을 이으면서 봉하마을은 일약 유명 관광지로 변했다. 현직 대통령 보다 전직 대통령의 인기가 더 높은 상황을 MB의 청와대가 지켜보기란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정치보복은 MB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사법테러를 가리킨다. 현재 MB와 그 주변에 대한 수사는 이미 오래전 드러난 비리를 당시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넘긴 것을 이제야 제대로 수사해 밝혀지는 것일 뿐 정치보복은 전혀 당치 않는 얘기다.
 
2007년 대선 당시부터 BBK와 다스 비자금 등 이명박을 둘러싼 의혹들은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대통령 당선과 함께 묻혀버렸다. 정호영 특검도 철저히 살아있는 권력에 봉사했을 뿐 진실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임 중에는 4대강·자원외교·방위산업 등 이른바 ‘사자방’이란 비리 패키지를 만들어 냈다. 이 또한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끈질기게 추적해 온 H신문의 K모 기자는 오랜 취재 끝에 다음 두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첫째, “이명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고, 둘째는 “절대로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 그것이다.
 
MB는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정치보복’도 ‘보수궤멸’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종로 국회의원 시절부터 15년이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그가 최근 MB에게 비수(匕首) 같은 마지막 충고를 던졌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명박 한 사람 뿐이므로 양심에 따라 진실을 밝히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라.”

자신이 배반했던 옛 부하의 이 말을 MB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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