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최근 10억원을 횡령한 대기업 직원이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재용 부회장은 1심에서 고작 5년을 선고받았다. 특검에서 구형한 형량만 12년이다. 2심에서라도 엄중한 판단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사무처장)

‘불안한 마음’은 적중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은 지난해 2월 17일 구속된 이래 353일 만에 석방됐다. 가장 쟁점이 됐던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출연금의 뇌물성 여부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승계 등을 청탁한 혐의는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질책 등 강요에 못 이겨 재산을 출연했다면서 국정농단의 주범은 박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이라고 못 박았다. 이 부회장을 위해 탄원서까지 제출했던 박 전 대통령으로선 확실히 불리해진 상황이 됐다.

서울고법 형사13부(정형식 부장판사)는 5일 이재용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공범으로 기소된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과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에게도 각각 징역 4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됐다. 1심과 2심의 온도 차이만큼 이 부회장의 선고 결과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극명하게 갈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가 열리는 5일 오후 1시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국정농단 단죄, 사법정의실현, 삼성적폐 청산, 이재용 부회장 엄중처벌 촉구'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조나리 기자>

◇  ‘좌절’과 ‘만세삼창’ 뒤섞인 항소심 재판

이날 법원 주변은 온통 이재용 부회장 선고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법원 밖에는 선고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재판에 참석할 이 부회장의 모습을 담기 위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재판 한 시간 전인 오후 1시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삼성 노조, 민주노총 등 시민사회단체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오늘의 선고가 사법부가 삼성으로부터 독립하는 날이 되길 바란다”면서 “만약 1심과 같거나 오히려 낮은 형량을 받는다면, 한국 사회와 사법부가 또 다시 삼성권력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 사무처장은 이날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은 국민연금을 망가뜨리고 한국 경제의 신뢰를 떨어뜨린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1심은 관대했다”면서 “특검에서 인정한 혐의들만 인정돼도 수십년은 선고가 가능하다. 엄중처벌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안 사무처장은 “한편으로는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너무 많은 법들이 삼성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을 봐왔다”면서 “이제라도 이 같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헌법을 유린하는 무노조 경영 중단,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 등이 수반되는 새로운 삼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청권이 없는 시민들이 법원 로비 TV 앞에 앉아 이재용 부회장의 선고 결과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조나리 기자>

법원 안에서는 ‘철통보안’이 이어졌다. 법정 복도까지는 출입이 허용했던 통상 재판과 달리 훨씬 강도 높은 보안을 유지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이 열리는 312호로 갈 수 있는 모든 입구가 폐쇄됐고, 이는 외신기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선고가 시작되자 방청권을 얻지 못한 시민들이 TV 앞으로 모여들면서 속보를 숨죽여 지켜봤다. 이 와중에 일부 시민들이 “‘좌빨’들이 기자회견을 너무 많이 한다”거나 “법대로 하라고 해라. 이재용(부회장)이 무슨 죄가 있냐”며 소리를 질러 제지를 받았다.

앞서 오후 3시 30분 선고가 끝날 것이란 예측과 달리 3시 10분 무렵 선고가 내려졌다. 허탈한 듯 말없이 TV 화면만 응시하는 시민들과, “만세! 집행유예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이 한 데 모여 있던 법원은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초 취재진들은 이재용 부회장이 법원을 나서기 전 소감을 듣기 위해 포토라인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부회장은 곧바로 버스를 타고 구치소로 향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가 끝나고 취재진들이 이 부회장의 소감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날 이 부회장은 곧바로 버스를 타고 구치소로 향했다. <조나리 기자>

◇ 정유라에 말 ‘빌려준 행위’만 뇌물로 본 재판부

항소심 재판부는 우선 이재용 부회장이 자신의 경영 승계 대가로 뇌물을 지급한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승계 작업에서 특혜를 요구하거나 특혜를 취득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미르‧K스포츠 재단 등에 대한 재산 출연도 뇌물로 볼 수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은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타인에 나눠준 박 전 대통령과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사익을 추구한 최서원(최순실)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하고 최서원의 그릇된 모성애로 인해 벌어졌다”고 정리했다,

이어 “피고인들은 정유라에 대한 승마지원이 뇌물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뇌물 공여로 나아간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의 이같은 판단은 이재용 부회장의 묵시적 청탁 혐의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1차 단독면담 이후 10개월간 어떤 뇌물도 전달한 사실 없다”면서 “다만 2차면담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야단을 맞은 후 계약 체결을 서둘러 체결했고, 정유라 외 다른 선수들에 대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었지만 최서원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과 관련해서는 대가성이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삼성이 정유라에게 고가의 말을 준 것이 아닌, 빌려준 것으로 보고, 빌려준 행위만 뇌물로 인정했다. 또한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도 일부는 무죄 판단을 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으로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승마지원 요구를 쉽사리 거절하거나 무시하긴 어려웠다 보이고, 수동적으로 이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면서도 “범행 전력 없고 나이와 성장 환경 등을 고려해 양형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류하경(법무법인 휴먼) 변호사가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 후 판결 내용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아래)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반대편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집행유예를 자축하는 보수단체 회원들 모습. <조나리 기자>

◇ 시민단체 “마지막 기회 외면한 사법부, 삼성 앞에 굴복”

이재용 부회장이 호송버스에 탑승한 직후 한쪽에선 선고 내용에 대한 법조계 및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입장발표가 열렸다. 삼성SDS 직업병 피해자 유족은 “이제 우리의 억울함은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하냐”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재용 부회장이 법원을 떠난 오후 3시 40분.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과 법조인, 시민단체 회원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기자회견 자리에 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류하경 휴먼 변호사는 “대법원에 따르면 뇌물죄는 뇌물이 전달되면 성립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뇌물죄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잘못됐다. 판사가 기본부터 다시 공부해야 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에 못 이겨 돈을 줬다고 하고 있지만 실제 강요죄는 단순히 질책 수준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면서 “과거 군사독재 정부도 아니고,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지원하라는 말 한마디를 강요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류 변호사는 이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특검도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법원이 남아만큼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기대한다”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 유족들이 자리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을 보고 현장에 있던 취재진들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춥냐. 날씨마저 야속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고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는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사법부가 국민의 수준에 못 미치는 판결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삼성SDS 직업 피해자 유족은 “내 딸은 뇌종양 판정을 받은 뒤 수술을 받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있는 처지가 됐다”면서 “2심 선고를 앞두고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다. 우리의 억울함은 어디에 가서 호소해야 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법은 잘 모르지만,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며 “10억원을 횡령한 직원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는데 집행유예가 말이 되냐. 힘없고 돈 없는 국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재판부를 질타했다.

한편 이날 외신들도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선고를 일제히 보도했다. 주요 외신들은 재벌 대기업의 위법 행위에 관대한 한국 사법부의 관행을 꼬집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항소심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면서 “한국 재판부가 대기업의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했던 과거의 관행을 되풀이 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은 부패 스캔들에 휩싸인 기업인들에 대해 가벼운 처벌을 종종 해왔다”며 “이재용 부회장의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도 두 번의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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