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우원조
▲17대 국회의원 정책비서관 ▲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 정책보좌관 ▲19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연설비서관 ▲부산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2018년 2월 9일,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한반도기를 왼쪽 가슴에 단 남북한 선수단들이 맨 마지막에 공동 입장을 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관중과 선수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다.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 입장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한반도기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한민족이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감동이 있었다.

“콩을 삶으려고 콩대를 태운다/ 솥에서 울어댄다/ 본래는 한 뿌리에서 났는데 서로 졸여댐이 어찌 이리 급한가”
이 시는, 1990년 2월, 대만의 중국통일연맹 대륙방문단을 맞은 장쩌민이, 한 형제인 중국과 대만이 ‘서로 원수처럼 지내지 말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읊은 <칠보시 七步詩>의 한 구절이다.

이날을 계기로 중국과 대만은 소통의 물꼬를 텄고, 2008년 3월 대만의 제12대 총통으로 취임한 마잉주는 통신·통상·통항(서신왕래·경제교역·해운항공)으로 대변되는 ‘3통 정책’을 추진했다. 이어 2010년에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맺었고, 2014년 2월 11일에는 중․대만 장관급 회담을 개최하는 등 지금까지 ‘하나의 중국’을 향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중·대만의 ‘하나 되기’ 위한 역사는, 역설적이게도 양국이 분리된 날에서 부터 시작됐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3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대만을 쫓겨난 국민당은 이날 톈안먼 광장에 대한 공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판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장제스는 결국 공군에 내렸던 공습 명령을 철회했다. 톈안먼과 쯔진청(자금성)을 파괴한 대역죄를 저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마오쩌둥과 장제스를 갈라놓고 있었지만 대륙에 대한 역사 인식은 둘이 하나였던 셈이다.

허나, 우리의 분단의 상처와 괴리감은 깊고 크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남북 간 대화의 장’을 이용만 하려고 드는 북한의 태도 또한 우리가 북한을 신뢰하기 힘들게 하는 이유다.

개막식에서 남북이 함께 입장할 때, 우리민족의 아리랑이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잠시나마 스포츠 정신으로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그 순간이 어쩌면 긴 역사 속에서 중요한 ‘한 지점’이 될 수도 있으리라, 많은 국민들이 간절함 마음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이 순간, 대한민국에서 통일을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통일과정에 대한 의견은 매우 대립적이다. 연장선에서 진보와 보수도 나뉘어지고, 한 쪽이 다른 쪽을 몰아세우거나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나뉘어지고, 거기서 또 나뉘어지곤 한다.

‘나뉘는 시대’에서 이제, ‘합쳐지는 시대’로 한발을 내딛어 보자.

당장 생각이 같아질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생각의 거리만이라도 좁혀보았으면 한다. 보수도 진보도, 좌파도 우파도 아닌, 같은 핏줄을 가진 한민족의 관점으로 접근해 본다면 한두 발 정도는 가까워지지 않을까. 장쩌민의 말처럼 “본래는 한 뿌리에서 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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