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논란'에 휩싸인 이윤택 전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성추행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Me too(#미투)’ 운동이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폭로를 기점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한 자생 노력 없이는 ‘폭로 릴레이’에 그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강력한 사후 조치가 따르지 않을 경우 어렵게 피해 사실을 고백한 피해자가 오히려 진실공방의 당사자로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적은 이윤택 연극 연출가의 ‘사과 기자회견’ 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 연출가는 “피해를 본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면서도 “극단을 18년간 운영하면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형태의 일”이라거나,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합의된 성관계였고 생각한다”는 식의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해 비난을 받았다.

연극계 관계자들은 #미투 운동의 본질은 가해자의 사과는 물론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피해자 잘못이 아닙니다”... 기폭제 된 서지현 검사 인터뷰

지난 1월 29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자신이 겪었던 성추행 경험을 폭로하는 글을 올렸다. 서 검사는 글 말미에 ‘자신도 당했다’는 의미의 #Me Too를 달고 “내부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작은 발걸음이라도 됐으면 하는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같은날 서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당시 피해 상황을 더욱 자세히 폭로했다.

서 검사의 인터뷰가 나간 후 그 다음날까지 온통 서 검사의 인터뷰로 도배됐다. 이는 그간 침묵해온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기폭제가 됐다. JTBC는 곧바로 ‘문단 내 성추문’ 폭로를 이어갔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최영미 시인의 인터뷰를 단독 보도한 것. 고은 시인은 결국 2013년 경기도 수원시가 마련해준 현재의 거주 공간을 떠난다고 지난 18일 발표했다.

정치권도 목소리를 냈다. 첫 주자는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13년 전 변호사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검사장 출신의 로펌 대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관심이 일회적인 호기심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며 “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말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같은달 8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당 소속 당직자의 성폭력 가해 사실을 공개하며 “권력의 정점에 있는 정치권부터 자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내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 <JTBC 화면 캡처>

◇ 문화예술계 성추문 논란... “터질게 터졌다”

‘연극계 거장’으로 군림해 온 이윤택 연출가 역시 #미투 운동에 따른 폭로로 대중에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이 연출가는 최소 1999년부터 막내 여성 단원들을 상대로 마사지 등을 시키며 상습 추행을 일삼았다. 두 명의 피해자는 각각 이 연출가에게 성폭행을 당해 두 번의 낙태와 임신 불가 판정받았다고 주장해 충격을 줬다.

이 연출가는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공식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그 동안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면서도 “성폭행은 없었다. 법적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죄 행위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기에 법적인 처벌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 연출가는 또 “선배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을 했는데 번번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연출가의 발언과 달리 연극 등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그 누구도 절대 권력자인 연출자의 폭주를 막을 순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독립기획자 임인자 예술감독은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이제야 터졌지만 과거에도 연극계 내에서의 권력 관계에 따른 성폭력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 왔다”면서 “나 역시 여성이지만 감독으로써 한편으로 가해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출가의 비위행위에 대해선 피해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한다고 해도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면서 “그런 분위기가 이렇게 오랜 시간 예술계의 성범죄 문제가 방치되고 묵인된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임 감독은 #미투 운동을 통해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도 변화될 것이란 희망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희망이 아닌 반드시 변해야 하며,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에 동참한 한 연극계 관계자 A씨는 자신의 SNS를 통해 “그동안 가해를 방관하진 않았는지, 내가 가해자였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봐달라”면서 “성범죄는 ‘당사자의 문제’가 아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변화를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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