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칠레에서 '포괄적·점진적 TPP(CPTPP)'의 서명식이 열렸다. 사진은 인사를 나누는 각국 대표들. 왼쪽부터 일본, 베트남, 브루나이 대표.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일본과 캐나다 등 세계 11개국이 8일 칠레에서 서명식을 가졌다. 각국 대표들이 서명한 문서는 다름 아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작년 1월 미국이 공식 탈퇴한 이후 한동안 유명무실화됐던 이 협정은 이제 ‘포괄적·점진적 TPP(CPTPP)’, 또는 미국을 제외한 11개국이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TPP 11’로 불리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 폐지 위기 처했던 무역협정의 부활

작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협정 탈퇴를 선언했을 당시 세간에서는 “TPP는 이제 끝났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남은 국가들의 경제규모를 모두 합쳐도 미국보다 작을 뿐 아니라 환태평양의 경제구도를 이야기할 때 미국을 배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대다수의 국제협정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왔던 과거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죽어가던 협정에 호흡기를 단 것은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였다. 블룸버그는 특히 일본이 여타 회원국들의 이탈을 막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며 아베 신조 총리에게 높은 점수를 매겼다. 일본이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대응할 무역체계를 갖췄다는 점도 중요하게 언급됐다.

새 경제동반자협정에는 일본과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싱가포르·말레이시아·베트남·멕시코·브루나이·칠레·페루 등 아시아·오세아니아·아메리카의 주요국들이 참여한다. 전 세계 GDP의 13%를 차지하는 이들 11개국은 자국 내 비준절차만 마무리하면 무관세 상품·서비스 교역, 나아가 노동 이슈와 환경, 공공조달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시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 나갈 땐 마음대로지만, 들어올 때는 아니다?

미국의 TPP 탈퇴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다. 다자무역 대신 양자무역협정을 선호하는 평소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최근 백악관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은 지난 2월 27일(현지시각) “대통령과 TPP에 참여하는 방안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협상에 나설 의사가 있으며, “더 나은 조건이 있다면” 재참여를 위해 11개국 대표들과 마주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호혜’의 이름하에 보호무역을 효과적인 집행수단으로 사용해왔던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가 변한 것은 아니다. 11개국이 칠레에서 광역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던 날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공식화했으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진행 중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관세부과대상에서 제외하는 외교적 배려까지 선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더 나은 조건’ 또한 미국 측의 이익만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

CPTPP 서명식에 참여한 11개국 대표들. <뉴시스/AP>

재협상에 나서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CPTPP 회원국들로부터 차디찬 반응만을 이끌어내고 있다. 한때 “미국 없는 TPP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던 일본은 이제 재협상 요구에 난색을 표하고 있으며,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조약을 수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블룸버그는 9일 기사에서 “TPP의 부활은 세계 경제가 미국 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단평했다. 미국이 국제협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갈등이 일어났을 때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는 ‘아메리칸 리더십’이 더 이상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라는 자조의 목소리였다.

◇ CPTPP와 RCEP 사이

TPP 협상이 처음 시작될 당시 주요 참가 후보로 거론됐던 나라들 중엔 한국도 있었다. 지리상으로 환태평양 지역에 속하는 것은 물론, 캐나다와 맞먹는 수준의 GDP도 보유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까지 참가여부를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고 있다. 이번 서명식을 통해 한국 수출액의 약 22%를 차지하는 국가들이 거대 자유무역시장을 형성하게 됐음에도 여전히 “가입 여부는 연내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협상 자체가 수년 전부터 시작됐던 만큼, 가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상당히 미적지근한 태도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CPTPP는 과반인 6개 회원국이 비준을 마치면 협정이 발효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내년 초까지는 해당 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 두 경제동반자협정을 대하는 정부의 온도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8일 서명식 소식을 알리며 CPTPP가 한국의 대외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국이 회원국 다수(일본·멕시코 제외)와 FTA협정을 맺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중국이 주도하는 RCEP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미국·일본의 CPTPP와 중국의 RCEP 사이에서 한국이 후자를 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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