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2 19:27 (월)
[유승찬의 ‘숏컷’] ‘앙시앙 레짐’ 해체를 향한 세 개의 징후
[유승찬의 ‘숏컷’] ‘앙시앙 레짐’ 해체를 향한 세 개의 징후
  • 시사위크
  • 승인 2018.03.1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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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블랙홀’로 기억되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3월 14일 ‘화이트 데이’에 별세했다. ‘우주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평생 시간의 역사를 탐구해 온 그는 루게릭병과 싸우다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인류의 에너지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우주공간에서 입자가속기 실험을 하다가 차원이 다른 평행세계로 떨어져 혼란을 겪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클로버필드-패러독스>에 따르면, 호킹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고 상상할 수도 있겠다. 인류가 낳은 천재 물리학자가 우주 속에서 영면하기를 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격변을 마주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며 기존 질서를 뒤흔든다. 마치 블랙홀 앞에 선 느낌이 이럴까. 앙시앙 레짐(구제도, 구체제) 해체의 징후들이 불연속적으로, 아주 강한 강도로 포착된다. 채 100일도 남지 않은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통제불능 이슈들의 출몰은 다음날 아침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개최 약속은 분단체제 극복의 신호탄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규정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발걸음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 결과가 이렇게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김여정의 방남과 특사의 방북이라는 단순한 교류가 낳은 대변화는 어찌 보면 초현실적이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문 대통령의 진심과 상상력이 통했다. 유연하면서 상대를 최대한 존중하는 외교전략의 승리다. CNN 기자의 말처럼 위기를 평화의 기회로 전환시킨 문 대통령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할 일이다.

4월 남북정상회담과 5월 북미정상회담은 2년이 넘게 걸려도 내리기 힘든 결론을 이틀 안에 만들어낸 것과 같다. 구악의 생산공장이던 분단체제 해체와 극복을 위한 '선명한 입구'를 마련한 셈이다. 물론 대통령의 말대로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며 유리그릇처럼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기적이 일어나듯이 분단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작업에 남과 북, 미국이 동시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 적이 있었나. 분단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연명해온 자유한국당이 최악의 ‘멘붕’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존재 근거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정치인생을 단 2시간 만에 끝장낸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남성지배권력이라는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구체제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저녁 8시 jtbc 보도 후 2시간 만인 10시, 더불어민주당 긴급최고위원회는 안희정 제명을 의결했다. 유력 대선후보이자 광역단체장이 김지은 씨의 폭로 2시간 만에 정치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의 지배권력구조에 대한 무차별 폭격이며 성평등과 정의를 향한 더는 미룰 수 없는 항거다. 이는 야만의 시대를 끝장내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대장정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을 위한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에 진보-보수라는 낡은 이념 프레임을 덧씌우려는 시도는 산산조각나게 돼 있다.

미투 운동은 2차 가해와 보복이라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굳건한 연대 속에 더욱 강해질 것이다. 미투 운동이 낡은 구질서 해체와 정의롭고 혁신적인 미래를 향해 전진하려면 더 많은 연대의 틀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후반을 전진시킨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모 루시 스톤의 말처럼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면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간절한 마음으로 개헌을 추진해 달라고 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지방선거 동시 개헌투표 실시를 그저 대통령의 레토릭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 개헌은 분단체제, ‘87년 체제’의 중앙집권적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사람의 권리와 지방 권한의 대폭 강화 등을 통해 보다 평등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2년 대선, 지선 동시실시 카드를 꺼내 들었다. 2년 뒤 실시되는 2024 총선을 중간평가로 활용하자고도 했다. 즉 국민들은 2년마다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선출하거나 평가할 기회를 갖게 된다. 매혹적인 제안이다. 정치권은 개헌논의를 그저 명분용으로 미루거나 반대하다가 대통령의 진심이라는 기습을 당했다. 단순한 정치적 카드로 꺼내든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마주한 것이다.

남북-북미 정상회담, 미투 운동, 개헌. 어느 것 하나만으로도 메가톤급인 이슈 세 개가 우리 앞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 세 개 이슈의 공통점은 모두 구체제, 구질서 해체를 지향하고 촉발한다는 점이다. 체제 변혁의 거대한 흐름이다. 이 거대한 흐름은 얄팍한 계산으로 거스르거나 모면할 수 없다. 지방선거는 블랙홀을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2020년 총선은 여야의 싸움, 진보-보수의 싸움을 넘어 구체제와 신체제의 한판 승부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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