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정계성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5.18광주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폭행 피해를 받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5.18광주민주화 운동에서 여성인권 문제가 전면에 나온 것은 사실상 처음으로 파악된다. 미투운동 등 여성인권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5.18광주민주화 운동 진상규명에도 새 국면이 열리게 됐다.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5.18광주민주화 운동 메시지를 통해 “평범한 광주의 딸과 누이들의 삶이 짓밟혔다. 가족들의 삶까지 함께 무너졌다”며 “한 사람의 삶, 한 여성의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유린한 지난날의 국가폭력이 참으로 부끄럽다”고 밝혔다.
◇ 문재인 대통령, 계엄군의 성폭행 진상규명 지시
특히 문 대통령은 “더욱 부끄러운 것은 광주가 겪은 상처의 깊이를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 알지 못하고 어루만져주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라며 “역사와 진실의 온전한 복원을 위한 우리의 결의가 더욱 절실하다. 성폭행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반드시 밝혀내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국방부와 여성가족부, 국가인권위원회로 하여금 공동조사단을 꾸려 진상규명에 나서게 한다는 방침이다.
당시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사건이 사회적 관심을 받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5.18 진상규명 공동대책위가 피해자들의 진술을 기록한 구술자료가 일부 공개되면서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여고생이었던 A씨는 하교 중 군용트럭에서 내린 계엄군에 의해 인근 야산으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 A씨의 증언에는 A씨 외에 다른 피해자들도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A씨는 극도의 정신이상 증세로 고통을 겪다가 승려가 됐다.
이밖에도 광주 모 여고생 B양도 계엄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가 1985년 전남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퇴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분신자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회사원이던 C씨도 새벽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계엄군에 의해 심한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다는 가족들의 증언도 있다.
◇ 얘기 못한 사람 더 있다
당시 전남대 4학년이었던 김선옥 씨는 지난 8일 계엄군에 체포돼 계엄사령부 수사관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김씨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성폭행 후 수사관이) 살아가면서 잊어라. 여기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잊어야 네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며 “나처럼 얘기를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38년 만의 미투였던 셈이다.
광주시내에서 온몸이 짓이겨지고 가슴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된 고 손옥례 씨의 사례도 있다. 가슴을 대검으로 찌른 뒤 실신한 상태에서 성기 부위에 총격을 가한 것으로 검시조서에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는 ‘오월의 노래2’의 가사로 전해진다.
사실 5.18민주화운동이나 전쟁 등 격변기에는 노인과 아이, 여성 등 약자들의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희생자’라는 큰 클에서 다뤄졌을 뿐, 성폭행 등 특정계층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다. 진상규명을 덮으려는 세력의 방해도 있었지만 사회적 분위기 자체도 성폭행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38돌을 맞아 ‘성폭행’ 문제가 사실상 처음으로 중심에 나오게 된 배경이다.
5.18 부상자동지회장을 맡았던 이지현 씨는 CBS라디오에서 “5공 청문회 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했더니 국회의원이나 보좌관들이 ‘아무리 악랄하지만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굉장히 꺼려했다”며 “국민들에게 폭로하려고 그랬는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짓밟힌 여성들의 삶을 보듬는 것에서 진실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겠다. 민주주의의 가치만큼 소중한 한 사람의 삶을 치유하는 데 무심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겠다”며 “광주라는 이름으로 통칭됐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임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