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 왔음.” -박근혜 정부 시절 기획조정실이 작성한 ‘현안 관련 말씀자료’ -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법관의 동향을 파악하고 주요 사건 처리 방향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요 사건 중에는 선거에 영향을 줄만한 정치적 사건은 물론 노동계 현안인 통상임금 판결, 오랜 시간 해고 무효 투쟁을 했던 KTX 승무원들의 판결도 포함돼 있었다. 특별조사위는 대법원의 최대 현안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부의 코드에 맞춘 판결이 선고됐다고 판단했다.

◇ 부당거래? ‘판결거래’ 드러난 사법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퇴임식에서 “정치적 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는 순간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는 오히려 정체적 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을 이용해 당시 사법부의 최대 현안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 같은 정황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한 특별조사위의 조사 결과 문건으로 드러났다.

특별조사위는 지난 25일 최종조사 결과 발표에서 “법관들의 성향, 동향, 재산 등을 파악한 파일들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면서 “주요 사건 처리 방향을 상고법원 도입과 연계해 검토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대법원은 2013∼2015년 박정희 정권 등 과거사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청구 기간과 범위를 제한하는 판결을 연이어 내놨다. 법원행정처는 이에 대해 “왜곡된 과거사나 경시된 국가관과 관련된 사건의 방향을 바로 정립했다”고 평가했다.

법원행정처는 또 통상임금 사건과 KTX 승무원 사건,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을 지목하며 “단순히 법리적 검토뿐만 아니라 국가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고려했다”면서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바람직한 노사관계 정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연이어 치하했다. 이석기 내란선동 유죄판결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것과 관련해서도 “단호히 대처했다”고 격려했다.

쌍용자동차 해고 사건과 KTX 승무원 해고 사건 모두 항소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선 패소로 선회했다. 결국 쌍용차 노동자들은 싸움을 계속 이어가야 했고, 한 KTX 승무원은 대법원 판결의 충격으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동향 파악은 판사들뿐만 아니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도 대상이 됐다.

(왼쪽부터)대법원이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가 유효하다는 취지로 판단한 2014년 11월 13일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주봉희 당시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울음을 참으며 대법원을 나서고 있다.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조합원들이 2015년 11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을 마친 뒤 눈물을 보이며 법원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이에 대해 민변은 “2014년 12월 ‘민변대응전략’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법원행정처는 민변대응전략 문건을 포함해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모든 문건을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KTX 해고 승무원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위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다.

◇ 조사 거부했던 양승태, 높아지는 강제 수사 요구

특별조사위의 발표 후 지난 주말 내내 양 전 대법원장은 포털 실시간검색 상위권을 유지했다. 특히 양 전 대법원장이 이번 특별조사위의 조사 요청에 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도 거세지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상조사위의 1차 조사 결과에 따라 2차 조사단인 추가조사위의 조사를 거부한 바 있다.

하지만 추가조사위는 2차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법관의 동향 파악 수집 문건이 확인됐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관련 각계 동향’ 등 재판 독립 침해가 의심되는 문건 다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향 파악에 따라 실제 법관들에게 불이익 등이 실행됐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혀 조사의 한계를 드러냈다.

양 전 원장을 조사하지 못한 특별조사위의 3차 조사 역시 셀프조사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별조사위도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해 인사상 불이익이 부과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형사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 다만 징계 등과 관련해서는 공직자윤리위원회, 법원감사위원회, 전국법관대표회의 등의 의견을 들어 조치할 것을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양 전 원장의 강제 수사 여부에 대해서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실제 사찰 피해를 입은 판사는 조사위에서 고발조치를 하지 않을 시 본인이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외에도 양 전 원장은 참여연대 1건, 투기자본감시센터 3건에 이어 28일 오전 긴급조치 사건 변호인단 등 관계자들이 추가 고발장을 접수한 상태다.

특히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지난 국정농단 사건 당시 가장 많이 고발장을 접수한 단체로, 미르·K스포츠재단과 검사들의 ‘돈봉투 만찬’ 사건, 진경준 검사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넥슨 게이트’ 연루자들을 처음 고발한 곳이다. 투기자본감시센터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은 현재 공공형사부에 배당된 상태다.

윤영대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는 지난 25일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현재 여러 조사위의 조사가 있었지만 이는 내부적으로 조사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검찰의 수사를 통해 압수수색이나 출석조사 등 다각도 조사를 통해 법원행정처뿐만 아니라 법원 자체도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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