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전 대법원 후문에 모인 키코 피해기업 대표들과 공동대책위원회.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수사와 키코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고 있다. <시사위크>

[시사위크|서초=현우진 기자] 31일 오전 10시, 서초구의 대법원 후문에는 검은 피켓을 든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섰다. 참석자 대부분은 한때 잘 나가던 중소 수출기업의 대표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의 주도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과 키코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정장 재킷을 벗어든 조붕구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사법정의가 죽었다는 의미에서 검은 옷을 입고 왔다”고 말했다.

◇ 초유의 사법농단에 ‘불공정재판’ 의혹 높아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관련 특별조사단이 지난 25일 발표한 조사보고서에는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 전략’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등장한다. 2015년 11월 작성된 이 문건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상고법원 설치에 부정적이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법무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특단의 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그동안 사법부가 대통령과 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해왔다”고 명시하면서 사법부와 청와대의 유착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한편 “더 이상 청와대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문구는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 요구가 빈번히 거부되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판을 압박용 카드로 활용했음을 암시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관련 특별조사단이 25일 발표한 조사보고서의 한 부분.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청와대)와의 효과적 협상 추진 전략’ 보고서의 한 부분에 키코 사건이 등장한다. <특조단 보고서 중 발췌>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최대한의 협조’ 사례에는 키코 사건 또한 ‘국가경제발전을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판결’ 중 하나로 포함돼있었다. 수출중소기업들이 환율 리스크를 헷지하기 위해 2007~8년 중 가입한 금융상품 ‘키코’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수백억원의 채무로 돌아왔다.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키코의 피해 규모는 약 3조원이며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그 액수를 최소 10조원, 도산과 상장폐지 등으로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기업과 2차 피해까지 더할 경우 20조원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피해기업들은 키코 상품을 판매한 은행을 대상으로 상품 자체가 기업들에게 불리하게 설계돼있었다는 내용의 소송을 진행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3년 9월 26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키코 상품 계약의 불공정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공동대책위원회는 이에 대해 사법부의 일부 인사들과 은행, 그리고 은행의 변호를 맡은 대형로펌들의 유착 의혹을 제기해왔다. 민사판례연구회, 통칭 ‘민판연’ 소속 판사들이 키코 재판에 다수 참여했으며 이들이 모두 중소기업 측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역시 민판연 출신으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참여해 공대위 측의 비판을 받아왔다. 키코 사건이 ‘사법거래’ 의심 목록에 포함돼있다는 이번 특별조사단의 보고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둘러싼 의혹에 불을 지른 셈이다.

대법원 종합민원실에 키코 피해기업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조붕구 공동대책위원장. <시사위크>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조붕구 위원장은 “그동안 대한민국에 최소한의 사법정의가 살아있다고 오인해서 경찰청 앞에서만 집회를 했다. 이번 특별조사단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들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심정을 밝혔다. 공대위는 또 “고등법원에서 많게는 70%까지 승소한 사건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키코 상품의 부적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이것이 결국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합작품이고 거기에 많은 이익집단들이 함께 했다는 의혹을 감출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키코 공대위 관계자들과 피해기업 대표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관계자들에 대한 구속수사와 키코 사건에 대한 재심, 사법거래 의혹과 관련된 법원행정처 파일의 내용 공개를 요구했다.

◇ 중소기업 피해 여전히 심각… ‘환 투기꾼’ 오명도

박용관 전 동화산기 회장이 국가로부터 받은 수출탑을 자신의 손으로 부수고 있다. <시사위크>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지 10년,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키코 상품의 사기성을 인정하지 않은 지 5년이 지났지만 중소기업인들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자료에 따르면 2008년 1,305억달러였던 국내 중소기업의 수출액은 키코 사건이 발생한 2009년 768억달러로 급감했으며, 중소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0.9%에서 21.1%로 뚝 떨어졌다. 국가통계포털 KOSIS에서는 중소기업 수출비중이 2017년에도 18.5%로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OEDC 평균 31.5%).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키코 피해기업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키코 사태로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밝혔다. 울산의 플랜트기자재 생산·수출기업 일성하이스코의 최재원 관리실장은 “연매출 3,000억원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회사가 키코로 인해 3년간 약 90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자금유동성 부족으로 부도가 났고, 2012년에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30년간 노사분규 한 번 없이 동고동락했던 430명의 임직원과 1,000여명의 협력업체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경제적 피해뿐만이 아니다. 수출을 주도하는 기업인에서 경제사범으로 전락한 신세에 대한 토로도 있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해 사업주는 죽거나 병에 시달리고, 사회적으로는 투기상품에 가입해 손실을 보고나서 ‘떼쟁이’ 취급을 당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매출액 420억원을 달성했던 타이어 제조설비업체 동화산기의 박용관 전 회장은 망치를 든 손으로 국가로부터 받은 수출탑을 부쉈다. 키코 사태로 동화산기는 채권자인 은행의 손에 넘어갔으며, 박용관 회장은 40년 넘게 키워온 회사에서 해임됐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