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지난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4개 항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담긴 사안 가운데 ‘완전한 비핵화’를 둘러싼 양측의 신경전이 날카로운 가운데 6.25 전쟁 중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의 유해 송환 문제는 이행단계에 들어서 탄력을 받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조·미 관계 수립’을 위한 북한과 미국의 움직임도 본격화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계기로 국제 외교무대에 본격 데뷔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파격적 행보와 대남·대미 유화조치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대화 상대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은 26세에 집권해 통치해온 재능 있는 사람”(6.12 정상회담 기자회견)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면서 김정은의 주가는 상종가를 경신하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김정은을 향해 “똑똑한 터프가이이자 위대한 협상가”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고민은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북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를 어떻게 미국 측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행해 나갈지가 관건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연일 띄워주면서 “그가 즉각적인 비핵화를 약속했다”며 북한이 핵 폐기에 나설 것을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의 비핵화가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대북제재를 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취임한 이후 공표한 제13810호(2017년 9월 20일) 등 대북제재 행정명령의 효력을 1년 더 연장하는 조치를 지난 23일 취했다.

북한은 북미정상회담 직전까지도 “우리가 핵을 포기하는 건 바닷물이 마르는 걸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관영매체를 통해 주장했다. 또 노동신문은 “미국이 운운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그에 티끌만 한 기대도 걸어본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북한의 이런 겉모습과 달리 북미 간에는 북한 핵 폐기와 미국의 대북 경제지원을 맞바꾸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 중이라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면 미국의 민간 기업이 북한에 투자하는 걸 허용 하겠다”(5월 13일 폭스뉴스 인터뷰)고 밝힌 건 가장 분명한 메시지 중 하나다.
 
미국이 북한에 줄 선물보따리는 시간이 가면서 품목과 물량이 점점 늘어나는 형국이다. 북한을 비핵화하기 위한 대북 의사타진 시점에서는 에너지와 식량 지원 같은 방안이 논의됐다. 정상회담 논의 및 관계개선 합의 이후엔 금융·인프라 등 국제사회의 정상국가로 자리할 수 있는 수준의 차원 높은 보상이 거론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아예 “미국은 북한이 우리의 우방인 한국과 같은 수준의 번영을 달성하도록 협력할 준비가 돼있다”는 발언까지 내놓았을 정도다.

이 같은 방안이 현실화하려면 무엇보다 북한의 핵 포기와 실제적인 이행조치가 뒤따라야 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검증망도 통과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면 대동강변의 트럼프 타워 건설과 평양 시내 맥도날드 매장 오픈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그야말로 ‘새로운’ 북미관계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평양은 이미 김정은 시대 들어 변신을 거듭해왔다. 집권 7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부터 평양에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들어선 뉴타운 형태의 개발 사업을 시작했고, 노동당원과 특권층이 주축인 평양 시민들을 위한 위락시설과 편의설비를 집중적으로 갖추는 데 주력해왔다. 평양과 뉴욕 맨해튼의 합성어인 ‘평해튼(Pyonghattan)’이란 말까지 나왔다. 신규 주택 건설 사업에 개인 사업자가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서구식의 아파트 분양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주택 임대업이 출현하고 소(小) 토지와 시장 매대를 사고파는 현상도 점차 번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 개발대상지에 올라 눈길을 끌고 있는 곳이 강남지역이다. 평양 중심부에서 서남쪽 강변에 자리한 강남군 일대는 아직 미개발지구로, 논밭과 과수원이 대부분이라 평양 시민들에게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마치 1970년대 서울 압구정이나 개포 지구와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말 이 곳을 ‘경제개발구’로 지정했다. 2013년 5월 경제개발구법을 만든 이래 22번째의 구역 지정이지만, 지방이 아닌 평양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향후 외자유치를 통한 평양판 강남 신도시 개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관건은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다. 미국이 제시한 당근 보따리를 챙겨 북한체제를 보장받고 경제적 부흥을 꾀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 핵과 미사일을 거머쥔 채 다시 지루한 협상이나 벼랑 끝 전술 쪽으로 치달을지는 전적으로 북한이 어떤 노선을 갈 것인가에 달렸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6년 동안 핵과 미사일 도발, 대내적인 권력 기반 다지기, 경제 건설 구상 제시와 추진 등의 노정을 거치며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일부 성과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리더십 발휘와 체제유지에 자신감을 가진 것 같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토대로 자신의 40~50년 집권 플랜을 짜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체제 생존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 정권을 거치며 북한이 70년 넘게 ‘철천지 원수’로 여겨온 미국을 향해 ‘체제 안정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맞닥트린 것이다. 그만큼 대북제제 속에서 체제 위기감을 느꼈고, 이번 기회를 체제보장을 위한 담판장으로 삼았을 것이란 추론이다.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애매한 주장이 아니라, 한미와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핵 폐기’를 실제로 이행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정은이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형국인 게 분명하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2차례 정상회담과 함께 트럼프와의 담판까지 판을 키울 대로 키운 상황이라 되돌리거나 판을 깨버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란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는 “개혁·개방을 하면 김정은이 망하고, 하지 않으면 북한이 무너진다”는 말이 회자된다. 변화의 파고에 직면한 김정은 체제의 딜레마를 함축하는 표현이다.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과 북미관계 물밑 조율 역할을 해온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그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김일성 주석이 주민들에게 약속했지만 공수표가 된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지상낙원’이 미국에 의해 현실로 다가올 순간이 닥친 것이다. 핵무기를 부여잡고 국제 제재의 굴레 속에서 낙후된 체제를 힘겹게 이끌어 갈지, 정상국가의 길로 걸어 나와 번영과 공존의 기회를 잡을지는 이제 김정은의 판단에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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