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요즈음 종교계와 교육계 및 정치계를 포함해 각계각층의 소위 저명인사라는 분들이 갑의 지위에서 벌린 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한 을과의 논쟁 과정에서 의혹이 점점 증폭되면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설수(口舌數)에 오르기 전에 미리 당사자에게 진솔하게 사과를 했더라면 잘 정리될 수도 있는 일이나 또는 오르내리는 초기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솔직히 사실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더 나아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잘못까지도 숨김없이 밝히며 참회한다면 대체로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물론 을의 경우에도 부당한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진실만을 이야기해야만 하겠지요. 만일 사실이 아닌 내용까지 추가하며 갑을 비방하다가 나중에 진실이 밝혀질 경우 다른 을들에게까지 그 피해가 미쳐 정말 억울한 경우조차 대중들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안목이 좁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머리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은 하나 실제로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경우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갈팡질팡, 횡설수설 하며 일을 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안목 넓히기’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 좁은 소견

먼저 넓은 안목의 반대인 좁은 소견을 뜻하는 ‘관견(管見, 대롱 구멍으로 내다보고 세운 좁은 견해)’의 쓰임을 선어록인 <증도가(證道歌, 깨달음의 노래)>의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영적 스승[대상大象]은 소인배[토兎]의 길에서 놀지 않으며 크게 깨달은 사람은 하찮은 (관습慣習적인) 구절(句節) 따위에 구속받지 않네. (그러니 단지 조금 흉내 내며 앉아 일으킨) ‘좁은 소견[管見]’으로 하늘[蒼蒼](같은 가르침)을 (절대로) 비방(誹謗)하지 말라! (만일 우열을 논하며 비방을 일삼는다면 아직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이니 내 지금 좁은 소견의 그대들을 위해서 결단코 넓은 안목이 열리도록 해주겠노라!”

참고로 <증도가> 가운데 필자가 늘 염송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는데, 만일 우리 모두 이를 일상 속에서 틈날 때마다 염송한다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겠지요. “다만 본바탕[근본根本]을 증득(證得)하고 나면 눈앞의 현실[지말枝末]은 근심하지 않네./ 마치 맑은 수정[유리琉璃]이 보배의 달을 머금은 듯하니/ (자타불이自他不二인) 우리 모두 이제 이 여의주[진리의 정수]를 (제대로) 통찰하고 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 결코 쉼 없으리!”

◇ 아유대죄(我有大罪)

이번에는 남의 입에 오르내릴 경우 넓은 안목으로 지혜롭게 대처했던 외적(外的) 성찰 사례를 하나 소개드리겠습니다. 동양과 서양 영성의 가교 역활을 했던 천주교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께서 엮은 <이십오언(二十五言)> 가운데 제5언 ‘아유대죄’에 다음과 같은 멋진 일화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말을 어떤 사람이 전할 때, 당신은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 죄까지도 알게 된다면, 어찌 나에 대한 비난이 이것에 그치겠습니까?’라고 전하는 사람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나의 큰 죄를 인정하면, 진실로 그 지적하는 다른 과실을 말다툼하며 변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의 성인(聖人) 프란치스코[방제芳齊]는 항상 자신에 대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살았습니다.”

◇ 소사성대(小事成大)

또한 조선 시대에 청소년을 위한 윤리교과서였던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내적(內的) 성찰에 관한 대목이 들어 있었습니다. ‘참을 수 있으면 우선 참고, 경계할 수 있으면 우선 경계하라. 참지 않고 경계하지 않으면 작은 일이 크게 되느니라.’[득인차인(得忍且忍) 득계차계(得戒且戒). 불인불계(不忍不戒) 소사성대(小事成大).]

특히 ‘소사성대’란 대목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세월호 침몰사건’을 포함해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터지고 있는 그 어떤 참사(慘事)도 지나고 난 다음에 세밀히 살펴보면 대부분 발생한 초기 단계에서 누군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심각성을 감지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참으로 안타까웠던 인재(人災)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대체로 일이 터진 후 꼬리자르기식으로 책임자 처벌에만 급급해 오고 있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그저 이런 좋은 가르침들을 일찍이 머리로만 익히고 온몸으로 솔선수범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 우리 성인(成人)들 모두의 잘못입니다. 즉, 이런 참사는 비록 맡은 바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의 탓이기는 하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현재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해득실을 쫓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언제든지 우리들 누군가에 의해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참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참사들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그동안 일어났던 참사들을 거울삼아 날마다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더불어 온몸을 던져 맡은 바 책무에 최선을 다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살아가야겠지요.

◇ 용서(容恕)와 참회(懺悔)

사실 무조건 엄벌(嚴罰)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필자가 맡은 강의마다 늘 언급하는 ‘용서와 참회’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일본 임제종의 반규(盤珪, 1622-1693) 선사 문하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문하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 가운데 물건을 훔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제자가 있었습니다. 모두 그 도둑을 쫓아내자고 말했으나 반규 선사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도둑 제자를 용서(容恕)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도난 사건이 일어나 범인을 잡은 결과 역시 그 제자였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번에도 그를 쫓아내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떠나겠다고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이때 스승은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너희들은 똑똑하며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이 절을 떠나 어디를 가더라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 녀석은 내가 지금 여기서 쫓아낸다면 어느 누가 받아주겠느냐? 그래서 너희들이 모두 이 절을 떠난다 해도 나는 이 녀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느니라.” 그러자 스승의 이 애정 어린 자비의 말씀에 (훗날 대선사로 명성이 자자하게 된) 도둑 제자는 깊이 참회하고 다시는 훔치지 않았으며 대중들도 자신들의 안목이 좁았음을 크게 뉘우쳤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웃의 한순간의 탐욕에 어리석게 즉시 분노하며 응징하는 엄격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이웃이 사회공동체의 용서와 본인의 뼈저린 참회를 통해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거듭 날 수 있도록 인내(忍耐)하며 돕는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 속에서 나름대로 더욱 성실히 그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이기 때문에, 일순간의 실수에 대해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종교계와 교육계의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판단됩니다.

◇ 산행(山行)과 수행(修行)

그러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넓은 안목을 갖출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안목 넓히기’에 관해 쉬운 비유(比喩)를 들어 보겠습니다. 필자는 주말도 거의 잊은 채 교육과 연구에 바빴던 30-40대를 지나 5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주말이면 거의 부부 동반으로 산행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행은 가치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선(禪)[자기성찰] 수행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대개 어느 산이든 입구에 도착하면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위해 등산 전 스트레칭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초심자들이 잡념을 제어하기 위해 익혀야 하는, 수세기에 집중하며 호흡하는 ‘수식관(數息觀)’ 기초과정과 같습니다.

몸 풀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산행을 합니다. 그런데 정상(頂上)은 하나이나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럿입니다. 종교를 초월한 다양한 선 수행 가운데, 특히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과 코드가 맞는 스승의 입실점검 지도아래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사방을 두루 살피며 산 밑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풍광에 매혹(魅惑)됩니다. 이는 선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참구하던 화두를 투과하고 가슴에 맺혀있던 모든 의심이 봄날 눈 녹듯이 다 사라져 버리며 동시에 막힘없는 안목(眼目)이 열리면서 한동안 희열(喜悅)에 휩싸이게 됩니다.

한편 산행을 시작할 때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그 다음 할 일들까지도 다 계획하며 산을 오르듯이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정상에 머물거나 그 체험을 자랑하며 떠벌리는 바보는 없습니다. 다만 희열을 맛본 다음 다시 있는 그 자리로 돌아와 넓어진 안목을 바탕으로 온몸을 던져 하루하루를 함께 더불어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삶을 보다 철저히 살아낼 뿐입니다.

◇ 평화(平和)의 기도

끝으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 모두 종교를 초월해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성인(聖人)이 지은 ‘평화의 기도’ 가운데 외적(外的) 성찰의 핵심인 다음 구절들을 뼈 속 깊이 새기노라면, 우리 모두 안과 밖이 일치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소중한 삶을 저절로 살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자비를/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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