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나이 마흔넷… 정말 좋아하는 일 하고파 ‘연기’ 도전
“윤여정 선생님 같은 여배우가 되고 싶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배우 강예나. <씨앤코이앤에스 제공>

[시사위크=이민지 기자] “발레리나를 은퇴하고 연극과 방송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여자 나이 마흔 넘었지만 정말 좋아하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뛰는 걸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모든 걸 놓고 매체 연기쪽으로 파게 됐다. 다들 무모하다고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그녀다. 영국 로열 발레학교‧러시아키로프 발레단‧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최초’ 입성은 물론 유니버셜발레단 최연소 수석무용수로 26년간 발레와 함께한 발레리나로서 정점을 찍은 강예나. 그가 한국 나이 44세에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배우로 ‘인생 2막’을 연다. 그의 스펙이라면 발레리나 인재 양성 등 명예롭고도 평탄한 길을 가도 끄떡없을 터. 하지만 강예나는 ‘모험’을 선택했다. 강예나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국내에서 세계적으로 활약한 발레리나 1호가 강수진이라면 2호는 강예나라고 해도 손색없다. 19년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약한 강예나. 그는 태생부터 발레리나였을까. 최근 <시사위크>와의 만남에서 강예나는 자신이 발레리나가 된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외가 쪽은 음악가들이 많은 집안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쳤는데 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적성에 안 맞았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제는 항상 발레리나 만화였다. 그 당시 웹툰이라는 것이 흥행하지 않던 때라 만화 대신 발레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시작해 몇 달 바짝 배워서 선화예중에 입학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때부터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세계적으로 활약한 발레리나 강예나, 그가 배우로 인생 제2막을 연다. <씨앤코이앤에스 제공>

강예나에게 빠질 수 없는 수식어 ‘최초’. 그의 인생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붙는다. 영국 로열 발레학교를 시작으로 러시아키로프 발레단과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입단까지. 하지만 이 모든 수식어를 얻기까지 그의 도전은 고난과 험로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는 인터넷 세대도 아니었고 콜렉트콜로 전화하던 때다. 편지를 일기처럼 써서 보냈고, 전화도 비싸서 한 달에 한 번 해야했다. 외로웠다. 그때가 1989년도였다. 88올림픽을 처음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브랜드 파워가 없었을 때였다. 더군다나 영국에 있는 로열 발레학교에 한국인 최초로 가니까 무시도 많이 당했다. 인종 차별 때문에 아직도 문제가 되지만 내가 유학 중이던 시절은 더 심했다. 그 대신 영어가 빨리 늘었고 단단해 졌다. 누구한테 기대고 하소연하기가 힘드니까...”

강예나는 지난 2013년 ‘오네긴’ 무대를 끝으로 유니버셜발레단을 공식 은퇴했다. 인생의 반년이 넘는 시간을 발레와 함께 살아온 그다. 은퇴를 선언했을 때 심경은 어땠을까.

“공식적으로는 26년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천 아시아 게임 개막식 무대도 올랐고 유니버셜 발레단 객원으로 섰다. 무대는 30년째 서고 있다. 은퇴를 하고서 나오니까 그동안 내가 발레리나로 살았던 삶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일어났었나’라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기분. 이제는 다른 장르(연기)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발레단에 놀러가서 몸도 풀고 후배들 하는 거보면 ‘진짜 말랐다’ ‘진짜 아프겠다’ 이런 측은한 생각이 든다. 반대로 내가 연기한답시고 다니는걸 보면 후배들도 측은해 한다. 각 분야에서 다 치열하게 사는 것 같다. 후배들은 내가 다른 분야에서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 받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무용계쪽 아이들이 연기 활동하고 싶다고 하면 많이 끌어주고 싶다. 대중문화와 무용계를 엮어주면서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의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 건 발레복 사업을 한 차례 한 바 있다. 강예나는 해당 사업을 통해 현실을 깨달았다며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수석무용수로 오랫동안 활동을 하다가 은퇴를 앞둔 1년 반전부터 ‘예나라인’이라는 발레복 제조회사를 차렸었다. 1인 회사였다. 무용의상이 아니고 무용연습복을 제조하는 회사였다. 무용수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취미로 무용을 많이 하기 때문에 수입패션을 가미한 의상과 무용복의 중간 라인을 만들고 싶었다. 무용수로 병행하면서 같이 했는데 세상을 많이 알게 됐다. 온실 속 화초로 있다가 이틀에 한 번씩 동대문 원단 시장가서 떼다가 공장 세 군데에 보내고.... 예술가는 돈을 밝히면 안된다는 구시대적인 생각이 있었다. 세금명세서를 떼고 그런 것들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때 현실을 제대로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너무 즐거웠다. 항상 큰 단체 생활을 하면 시선 하나까지 예술 감독님 등이 원하는대로 가고 입김이 많이 들어간다. 예나라인의 경우는 디자인도 혼자하고 사상도 나 혼자 했기 때문에 창의적인 환경이었다. 숨통이 트였다. 소소하게 사비로 시작한 거였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골치 아팠지만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연극 시작하고 연기수업하면서 접었다. 같이 병행하면 좋을텐데 멀티가 잘 안되는 성격이다.”

진지한 자세로 취재진과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강예나의 모습. <시사위크 DB>

발레복 하나에도 영혼을 담는 강예나, 그가 어떻게 배우로 제2의 인생을 구축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2014년도 인천아시아게임 개막식 때 공연을 했다. 그 전 해에 유니버셜 발레단과 공식적으로 은퇴를 했다. ‘몸이 괜찮을 때 국제무대에 서자’라는 생각으로 무대를 섰다. 사업을 하다가 다른 아티스트랑 콜라보레이션을 하니까 너무 좋았다. 이후 ‘다음에 뭘 해야하지’하는 찰나에 김수로 프로젝트 연극 10탄으로 만든 ‘발레선수’라는 연극이 알게 됐다. ‘발레를 모티브로 한 연극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댄싱9’에 출연한 최수진 씨를 통해서 김수로 씨의 연락처를 얻었다. 그날 저녁에 김수로 씨를 대학로에서 만났고 다음날 대본을 받고 오후에 읽고 하겠다고 했다. 훌륭한 배우들이랑 호흡을 맞추니까 너무 좋았다. 연극을 끝내자마자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최근 강예나는 소속사 씨앤코이앤에스에 둥지를 틀고 본격적인 ‘인생 제2막’ 준비에 나섰다. 세계적으로 활약한 강예나가 대형 소속사를 제치고 씨앤코이앤에스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봐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형 소속사에 들어가면 그만큼 회사는 시스템이 잘 갖춰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최희서 씨가 계신 소속사고, (회사가) 너무 덩치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같이 시작하면 좋을거라고 생각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게 나의 가치를 가장 알아봐주고, 클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다. 이에 마음이 갔다. 소속사를 결정한 뒤 모든 일들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어안이 벙벙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담담하다. ‘이제 정말 집중을 해야겠구나’ 결의를 다지게 된다. 19살 때부터 큰 단체 생활을 하다보다 소속돼 있다는 게 익숙한 사람인데 은퇴를 하고 혼자 뛰었다. 거기서 오는 외로움과 고독이 있었는데 소속사가 은퇴한 지 4년 만에 생기니까 너무 든든하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소속사 들어갔다고 끝이 아니다. 기쁜 마음도 있지만 담담하게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명성을 펼친 강예나가 꿈꾸는 배우는 어떤 모습일까.

“윤여정 선생님 같은 여배우가 되고 싶다. 윤여정 선생님은 최고의 여배우이신데도 불구하고 고르는 작품들이 안전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최근에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면서 너무 존경스러웠다. 윤여정 선생님은 대중들과의 호흡을 놓치지 않으시고 예능도 많이 하신다. 젊은 사람들의 감각을 이해하시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아름다우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배우가 된다면 윤여정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한다.”

취재진과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강예나의 모습. <시사위크DB>

강예나는 인터뷰 내내 자신감이 넘쳤으며 배우로서의 열정이 넘쳤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주저 없이 자신만이 지닌 ‘무기’가 뭔지에 대해 내뱉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늦은 나이 배우로 뛰어든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신체로 말을 하던 사람이어서 신체적인 자유로움이 분명히 있다. 제 장점이다. 또 외국에서 활동해서 영어 연기도 할 수 있다. 발레라는 장르는 (관객들과) 함께 하면서 리액션을 많이 받아야 한다. 배우를 늦게 시작하지만 핵심코어는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외국 같은 경우는 배우를 한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발레를 다 배운다. 기본 재료는 탄탄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40대 중반에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그녀다. 과연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너무 반대했다. 발레리나로서 정점을 찍은 아이인데 연예계 가서 밑바닥부터 시작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셨다. 경제적으로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도 걱정이셨다. 후배 양성에, 레슨하고 명예롭게 나이가 들 수 있는데 한파 주의보가 내린 날 제작사를 돌고 하는 모습들이 보기 안 좋았을 거다.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최근 출연한 연극 ‘칼집 속에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가 마음을 돌리셨다. ‘대중 앞에 서야하는 팔자인가보다’라는 생각이신 것 같다. 좋은 소속사에 들어가게 돼 어머니도 한시름 놓으셨다. 친언니도 1명 있는데 함께 힘들어 했다.”

강예나는 가족들의 마음까지 돌렸다. 한국 나이 44세. 늦은 나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때 그는 가슴 뛰는 일을 찾았다. 쉴 법도 한데 강예나는 뜨거운 가슴을 움켜쥐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세계적인 발레리나에서 배우 새내기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배우로서의 삶에 올인한다는 그가 ‘가식 없는 배우’로 또 한 번의 도약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가식 없는 배우다. 의외다’ 이런 말을 듣고 싶다. 왜냐면 발레는 고급스러운 장르에 있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결국은 한 사람이고, 망가질 때는 망가진다. 벽을 허무는 게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끼실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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