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각종 재활용 폐기물이 쌓여져 있는 박종철 거리. <시사위크>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 조성된 ‘박종철 거리’가 쓰레기 투기장으로 전락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올바른 역사재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조성했다’는 당초 취지가 무색할 정도다.

취재진이 현장을 살펴보니,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동판이 있는 자리에는 쓰레기와 재활용 폐기물 등이 가득 쌓여있었다. 또한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테이크아웃 플라스틱 컵 등이 너부러져 있었다. ‘제발 여기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달라’는 안내문이 무색했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시각이 평일 오전이었고, 유동인구가 많은 저녁시간에는 더욱 심각한 장면이 연출된다.

인근에 거주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안모(27) 씨는 “주로 밤 시간 대, 특히 주말 밤에는 쓰레기가 계속 쌓여서 박종철 열사가 새겨진 동판이 파묻힐 지경”이라며 “여름에는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로 추모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피해가는 흉물스런 곳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거리를 지나던 한 커플은 쓰레기를 피해 돌아가면서 “관리가 안 되는데 만들어놓기만 하면 뭐하느냐”고 목소리를 냈다.

◇ 주변 상인들과 일부 흡연자들이 원인

쓰레기는 박종철 거리 인근 상인들이 주로 투기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좁은 골목에 상점들이 밀집돼 있어 쓰레기를 배출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게 상인들의 하소연이다. 양념곱창 음식점을 운영하는 A씨는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데 식당 앞에 쓰레기를 내놓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되도록 사람이 없는 시간을 택해 피해를 주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대중음식점에 종사하는 B씨는 “전임자에게 저기에 가져다 놓으라고 인계를 받았다. 예전부터 저기에 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박종철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영화 '1987'의 한 장면. <1987 캡쳐>

지역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박종철 거리’는 박 열사가 머물던 하숙집 앞 작은 골목이다. 박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래 전부터 이를 알리는 조그마한 상징물이 위치해 있었다. 민간 차원이 아닌 ‘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거리지정을 선포한 것은 지난 1월의 일이다.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 이어 영화 ‘1987’이 흥행을 거둔 것이 본격적인 계기가 됐다.

영화 1987은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6.10 항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 이른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영화에서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대사로 표현된 그 사건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박 열사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졌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부산의 아들 박종철과 광주의 아들 이한열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었다. 문재인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 첫 번째 명분이 다름 아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기도 하다.

이 같은 시대흐름에 맞춰 유종필 당시 관악구청장은 서울시 예산 5,000만원과 관악구 예산 2,000만원을 합쳐 ‘박종철 거리’ 조성사업에 나섰다. 아울러 박 열사 기념관 조성 등 문화사업을 추진해 이 지역의 관광을 활성화시키겠다는 복안을 내놨었다. 하지만 지역상인들의 도덕불감증과 관할관청의 관리미숙으로 그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반응이다.

이에 대해 관악구청장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거리 주변의 일부 상인들이 관리를 도와주고 있고, 청소행정과 클린기동대가 수시로 출동해 거리를 청소하고 있지만 사실 그때 뿐”이라며 “상인들에게 쓰레기 배출 관련 지도를 포함해 쓰레기 문제를 시정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