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대중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性)인지’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영화 속 현실은 ‘반쪽짜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혐오’와 ‘성불평등’을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양성평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 대한 열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한국 영화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편집자 주>

 

많은 관객들을 불러모으며 큰 인기를 끈 영화 ‘써니’, ‘수상한 그녀’, ‘덕혜옹주’ 포스터. < 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 영화계의 오랜 속설 중 하나다. 제작비를 회수해야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구조의 상업영화 산업에서 작품의 흥행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여성이 주연을 맡은 다수의 작품들이 참패를 맛봤고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는 흥행에서 불리하다’는 인식이 충무로에 자리 잡았다. 이는 여배우를 내세운 기획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쩐지 이상하다. 남성 주연의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 성별을 근거로 들지 않지만 여성 주연 작품은 부진의 이유로 ‘여성 주연작’이라는 점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 이 같은 현상은 여성 중심 서사의 작품이 남성 주연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탓에 성별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작품이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도 낮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운데 흥행에 성공한 여성 주연 영화들은 ‘잘못된’ 속설을 깨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국내 상업영화 역대 박스오피스 상위 100편(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 기준) 속 여성 주연작을 살펴봤다. 크레디트에 여배우가 처음으로 나오는 영화는 ‘암살’(전지현), ‘수상한 그녀’(심은경·나문희), ‘써니’(유호정·심은경·강소라 등), ‘내 아내의 모든 것’(임수정), ‘아가씨’(김민희·김태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문소리·김정은), ‘귀향’(강하나·최리 등), ‘아이 캔 스피크’(나문희) 등이다.

‘도둑들’(김혜수·전지현), ‘해적: 바다로 간 산적’(손예진), ‘과속스캔들’(박보영), ‘늑대소년’(박보영), ‘미녀는 괴로워’(김아중), ‘댄싱퀸’(엄정화) 등은 여배우가 크레디트에 처음 등장하지는 않지만 극의 중심에 서서 주요 캐릭터로 활약한 영화다.

전지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암살’은 1,27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역대 박스오피스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암살’ 전지현 캐릭터 포스터. <쇼박스 제공>

일제 강점기 시대 여성 저격수 안윤옥(전지현 분)의 친일파 암살 활동을 그린 영화 ‘암살’(2015)은 1,27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역대 박스오피스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충무로에서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 중 유일하게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유례없는 여성 저격수를 전면에 내세운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전지현은 섬세한 감정 연기와 고도의 액션을 완벽히 소화해내며 스크린을 장악했다.

2011년 개봉해 700만 관객을 동원한 ‘써니’의 흥행도 눈여겨볼 만하다. ‘써니’는 학창시절을 함께한 칠공주가 25년 만에 다시 모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되찾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학창시절 추억과 우정을 통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 코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 캐릭터만을 내세운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의리’를 여자들만의 끈끈한 정과 뜨거운 우정으로 녹여내 호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써니’에서 아역으로 활약했던 심은경·천우희·강소라·민효린 등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연기파 배우로 성장했다.

‘덕혜옹주’(2016)와 ‘아가씨’(2016)도 각각 559만 명, 428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덕혜옹주’는 일본에 끌려가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배우 손예진이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덕혜옹주’의 흥행은 여성 원톱 영화에 대한 우려를 걷어낸 성과로 여배우를 내세운 영화의 훌륭한 선례가 됐다는 평을 받았다.

김민희와 김태리 주연의 영화 ‘아가씨’도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가씨’ 스틸컷. < CJ ENM 제공>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의 흥행도 놀라운 결과였다. 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으로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국내에서의 흥행은 쉽지 않아 보였다. 여성 투톱 주연작이라는 점과 한국 영화에서는 금기시됐던 ‘퀴어’ 소재를 다뤘기 때문.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는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았고 김민희와 함께 주연을 맡았던 김태리는 단숨에 ‘충무로 대세 배우’로 떠올랐다.

개봉 초기만 해도 이 영화들의 흥행 가능성에 대해 대부분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입소문이 돌면서 관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다. 결국 “재밌으면 본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가 증명된 것이다.

지난해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산범’, ‘악녀’에 이어 올해 ‘허스토리’를 선보인 배급사 NEW 관계자는 “배우의 성별보다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인지가 중요하고 이 가치를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다만 현실적으로 여성 원톱 주연 또는 다수의 여성 배우들이 나오는 시나리오가 적다고 설명했다. 이어 “잘 쓰인 여성 주연의 시나리오가 드물기에, 그런 시나리오를 만날 때면 굉장히 반갑고 내부에서 소중하게 검토한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