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대중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性)인지’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영화 속 현실은 ‘반쪽짜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혐오’와 ‘성불평등’을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양성평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 대한 열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한국 영화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편집자 주>

 

지난해 한국 상업영화에는 남성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 가운데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질적으로 하락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함. <영화 ‘여배우 오늘도’ 스틸컷에 대사 첨부>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OO 씨의 처, OO 씨의 모, 임산부, 여자 시체1, 룸살롱 마담…. 2017년 개봉한 한국 영화 속 등장한 여성 배역이다. 지난해 한국 상업영화에는 남성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 가운데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질적으로 하락했다. 많은 영화에서 남성들이 사건을 해결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안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여성들은 무기력했고 성(性)적, 살인 도구로만 소비됐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을 끌어모은 영화 ‘택시운전사’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현장 취재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도왔던 택시 기사 김사복 씨의 실화를 그렸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다룬 이 영화에서 여성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가진 여성은 김만섭(송강호 분)의 딸 김은정(유은미 분) 뿐이고 세 명의 여성이 더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누군가의 엄마이거나 아내일 뿐이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1,440만 관객을 동원한 ‘신과함께-죄와 벌’에서 예수정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지만 역시 이름은 없다. 자홍(차태현 분)의 어머니로만 존재한다.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한 전형적인 어머니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공조’ 속 여성 캐릭터들도 이름은 있지만 단순한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첫 스크린에 도전한 윤아(박민영 역)는 강진태(유해진 분)의 처제이자 북한에서 온 임철영(현빈 분)에게 반하는 게 다다.

많은 영화에서 여성들은 성(性)적, 살인 도구로 희생됐다. (왼쪽부터) ‘브아이아피’ (V.I.P), ‘청년경찰’, ‘범죄도시’ 포스터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롯데엔터테인먼트, 키위미디어그룹 제공>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에서 여성들은 성(性)적, 살인 도구로 희생됐다. ‘브아이아피’ (V.I.P)는 여성에 대한 과도한 폭력 묘사로 논란이 됐다. ‘브이아이피’는 북한 고위급 간부의 아들이자 사이코패스 살인마 김광일(이종석 분)이 남한으로 내려오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강간, 폭행, 살해 등의 도구로만 소비됐고 여성을 살해하는 장면이 불필요하게 잔인하고, 지나치게 긴 시간을 차지해 ‘여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또 ‘브이아이피’에서 광일에게 희생당한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이름 없이 ‘여성 시체’ 역으로 표현돼 논란을 더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여성 시체’ 역은 ‘여자’ 역으로 변경됐지만 영화 속 이름도 없는 9명의 여성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했을 뿐이다.

‘청년경찰’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여성들은 두 남성 주인공의 ‘헌팅’ 대상이거나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였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인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를 그리면서도 두 남성 주인공의 코믹함에 집중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680만명이 넘는 관객의 선택을 받은 ‘범죄도시’ 속 여성 캐릭터도 각종 폭력의 피해자다.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범죄도시’에는 다방에서 일하는 안혜경(유지연 분)과 룸살롱 마담(배진아 분)이 그나마 비중 있게 그려지지만 강간당하고 얻어맞는 등 수난을 당한다. ‘살인의 기억법’에서도 여성은 살인의 대상이고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항시 노출돼있다.

여성 캐릭터를 서사의 중심에 놓고 주체적으로 그린 영화 (왼쪽부터) ‘장산범’ 염정아, ‘아이 캔 스피크’ 나문희, , ‘악녀’ 김옥빈 스틸컷 < NEW,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물론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장산범’, ‘악녀’ 등과 같이 여성 캐릭터를 서사의 중심에 놓고 주체적으로 그린 영화들도 관객들과 만났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많은 영화 속 여성들이 수난을 당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혹자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이 같은 상황을 지적하는 필자를 ‘프로불편러’(매사 예민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도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해서 논쟁을 부추기는 유난스러운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라 생각할 수 있다. 또 많은 범죄의 대상이 여성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포르노그래피적 묘사와 잔혹한 범죄의 적나라한 재현은 경각심을 일깨우기는커녕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관음의 대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스크린 속 ‘여성 혐오’가 단순히 ‘프로불편러’의 예민함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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