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 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 시인의 <죽고 난 뒤의 팬티>라는 시일세. 내용도 쉽고, 읽고 나면 웃음이 절로 나서 자주 찾아 읽는 시야. 나라도 교통사고를 세 번 이상 겪으면 그 트라우마 때문에 운전대만 잡아도 겁이 나겠지. 그래서 시속 80km이상으로 달리면 앞좌석의 등받이를 잡는 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네. 하지만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쩐지를 확인”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은 아닐세. 아무리 ‘우스운 일로 가득’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죽으면서까지 팬티에 신경 쓰는 시인을 보면서 아니 웃을 수가 없네 그려. 물론 사고가 났을 때 병원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속옷을 볼 거라고 생각하면 깨끗한 팬티를 입고 있는 게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이미 ‘죽은’ 몸을 누가 본들 ‘죽은 자’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까지 생각하고 있으니… 웃다가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항상 ‘죽음’을 대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죽음’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보네. 죽음을 항상 옆에 있는 친구처럼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진지하고 강렬할 가능성이 높네. 하루하루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악한 삶의 조건에서도 주어진 시간 안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 쓰면서 열심히 살 가능성이 많지. 게다가 죽음과 친숙한 사람들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어. 반면에 천년만년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이 다른 생명들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할 가능성은 거의 없네. 특히 자기보다 약한 존재들에게 교만할 가능성이 높지. 거대한 부를 탐하거나 권력을 영원히 움켜쥐려던 두 전직 대통령이 지금 감옥에 있는 것을 보게나.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어리석은 짓들을 할 수 있었겠는가?

시인은 세 번의 교통사고 경험을 통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일세. 그러니 삶의 매 순간들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차를 타고 어딜 갈 때면 새로운 팬티로 갈아입어야만 안심이 되는 거구. 그런 행동은 시인 자신이 봐도 ‘정말 우습기만’ 하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진지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삶과 죽음이 항상 같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 한 순간을 진지해 질 수밖에 없거든.

​이문재 시인도 <백서 2 -죽음은 살아 있어야 한다>에서 죽음이 옆에 있어야 우리의 삶이 삶다워질 수 있다고 말하네. “죽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음이 삶 곁에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삶이 팽팽해진다./ 죽음이 수시로 말을 걸어와야/ 살아 있음이 온전해진다.// 죽음을 살려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살 수 있다./ 그래야 삶이 삶다워질 수 있다./ 그래야 삶이 제대로 죽을 수 있다.” 그는 또 <생일>이란 시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죽음과 겸상하는 날로 규정하기도 하지. “오늘은/ 꾹 참고 나를 보살펴준/ 내 죽음과/ 오붓하게 겸상하는 날/ 일 년 내내 잊고 지내/미안해하는 날/ 고마워하는 날.”

내가 왜 오늘 죽음을 이야기하는지 짐작하는가? 나이를 먹으니 좋아하던 분들이 하나 둘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게 안타깝고 마음 아프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지만, 며칠 전에 가신 노회찬 의원처럼 더 어린 사람도 있어. 모두 다 이 나라를 위해 평생 헌신하고 가신 분들이지. 나이가 들어 노한으로 가신 분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노회찬 의원이나 노무현 대통령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들을 보내는 마음은 더 아플 수밖에 없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런 분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일신의 안위보다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았던 그 분들의 힘의 원천과 죽음에 관한 그 분들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고민하게 되었네. 그분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을 것으로 믿고 싶거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무슨 뜻인지 알지?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일세. 죽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네. 죽음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지. 그러니 삶이 알차고 즐거울 수밖에 없어. 스티브 잡스도“언젠가는 인생이 끝나고 죽을 것이라 생각하면, 부차적인 것은 다 없어지고 본질만 남는다”고 말했네. 우리도 남은 인생 유쾌하고 진지하게 살다가 가세. 정직하게 사는 것도 잊지 말고. 메멘토 모리!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