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회계’에 가려진 빈부격차의 그림자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이 진부하기 그지없는 클리셰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회계제도 개혁에도 적용되는 모양새다. 오는 2020년 일정 기간 국가에서 지정한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도록 하는 ‘지정감사제’와 상장사의 감사 자격을 제한하는 ‘감사인 등록제’ 시행을 앞두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열세한 기업과 회계법인 양쪽에서 아우성이 들려오고 있다. [편집자 주]


[시사위크=범찬희 기자] 회계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오는 2020년부터 ‘감사인 등록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전국 190여 회계법인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새 제도가 도입되면 앞으로 40명 이상 회계사를 보유하지 못한 회계법인은 상장기업 감사 일감을 따낼 수 없게 된다. 이에 자격 요건을 충족하는 일정 규모 의상의 회계법인에서는 환영의 박수 소리가, 자격이 미달하는 중소 회계법인에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상장기업 감사를 맡을 수 있는 자격을 '4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회계법인으로 한정하려 하면서 중소회계법인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픽사베이>

◇ 2년 뒤 ‘감사인 등록제’… 높아진 상장사 감사 기준의 벽

금융위가 상장사 감사 자격의 문턱을 높이기로 한 건 감사품질과 공신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저축은행의 대규모 부실 사태가 터졌던 지난 2011년 회계법인이 제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정부는 감사인 등록제 도입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계 이견이 엇갈려 차일피일 제도 도입이 미뤄졌는데, 2015년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터지자 정부는 감사인 등록제를 도입키로 마음을 굳히기로 한 것이다.

금융위는 상장기업의 회계감사를 하려면 최소 40명 이상 회계사를 보유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본금 5억원 이상에 공인회계사 10명 이상 고용한 회계 법인이라면 상장사 외부감사를 맡는데 무리가 없다고 봤다. 갑작스레 약 4배 가량 문턱이 높아진 셈이다. 또 회계법인의 통합관리를 위한 조직과 내부규정, 전산시스템 등의 체계도 구축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이 같은 금융위의 결정에 밥그릇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중소 회계법인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규모의 잣대를 들이대 회계법인의 수준을 가름 하는 건 공정하지도 논리적이지도 못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한 중소 회계법인 관계자는 “5조원이라는 전대미문의 분식회계 사건이 발생한 대우조선해양의 외감을 맡은 곳은 국내 ‘빅4’ 회계법인 중 하나인 안진이지 않았었냐”고 반문했다.

◇ 40인 이상 회계법인 18% 뿐… 10곳 중 8곳 ‘자격미달’

이들은 금융위가 제시한 감사인 등록제가 시행되면 몇몇 대형 회계법인들이 일감을 독점하는 비정상적 시장 구조를 띄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22일 한국공인회계사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국내에는 총 186개의 회계법인이 설립돼 있다. 이 가운데 40명 이상의 회계사를 보유한 곳은 34곳(18%)에 불과하다. 10명 이상의 회계사를 고용하고 있는 법인이 155곳(83%)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순식간에 121개 법인에 자격미달의 꼬리표가 붙게 된다.

사정이 이쯤 되자 중소 회계법인들 사이에서는 일대 합종연횡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적잖은 중소 회계법인들이 M&A로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형편이다. 때마침 지난 4월 국회에서 회계법인간 분할 및 분할합병이 가능토록 한 공인회계사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도 중소 회계법인이 M&A에 한 가닥 희망을 걸게 하는 요인이다.

다만 개정안 통과 여부는 아직 불투명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통과 시기도 짐작하기 어려워 중소 회계법인들을 여전히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개정안 통과 후에도 분할과 합병 과정에 상당히 시간이 소용돼 자칫 내년 5월부터 시작될 상장사 감사인 등록제 신청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중소 회계법인들 사이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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