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9월 18일부터 평양에서 2박3일간 열린 제3차 남북정상회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파격(破格)과 신기록의 연속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순안비행장에 도착할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비행기 트랩 바로 밑에까지 나와 영접하는 순간부터 전개된 의전상의 파격은 물론 남북 두 정상이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가 결의를 다짐하는 모습은 그 어떤 정상회담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역사상 최초의 이벤트였다.
 
2박3일 동안 두 정상의 행적을 열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壓卷)은 단연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5.1 체조경기장 연설이라고 할 것이다. 한강에 여의도가 있듯이 대동강에는 능라도가 있다. 여도가 동그란 감자처럼 생겼다면 능라도는 호박고구마나 바나나처럼 가늘고 길게 생겼다. 여기에 체조경기장이 생긴 건 1970년대 중반이었다.
 
방북 이틀째인 9월 19일 밤,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이곳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다. 체조에 참가한 인원만도 1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김일성 시대 이후 대대로 북한의 체제선전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해 왔던 집단체조는 그러나 이날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다. 미국에 대한 어떤 비난 문구도, 대한민국에 대한 어떤 도발적인 언사도 보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긴 문장을 스텐드에 가득 차게 카드섹션으로 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체조를 관람한 뒤 김정은 위원장의 소개로 무대에 올라섰다. 경기장은 15만여 명의 평양시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기서 역사적이고 감격에 찬 연설을 약 7분 동안 이어갔다. 한반도 분단이후 남쪽의 대통령이 북한 지역에 들어 가 대중 앞에 연설하기는 전쟁 중인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연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 남침으로 빼앗긴 서울과 평양을 탈환한 뒤 그해 10월 29일 평양 시청 앞에 마련된 환영식장에서 감격에 찬 연설을 했다. 당시 평양 인구는 50만 명 정도. 황해도 출신의 이승만 대통령을 보러 온 청중은 평양인구의 10분의 1인 5만여 명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능라도 비행장에 착륙했고, 정일권 국군총사령관을 비롯한 군부 요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했었다. 그 시절 한강의 여의도에도 비행장이 있었다.

2018년 9월 19일은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문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로 통일의 당위성과 의지를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어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그림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라고 역설,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10분도 안 되는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객석에서는 모두 열 세 번의 크고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 절반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15만 여 평양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경기장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조치들을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구체적으로 합의했다”는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길고 힘차게 이어졌다.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5.1 체조경기장 연설은 2017년 5.18 민주항쟁 37주년 기념식 행사장에서 했던 연설과 함께 최고의 명연설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연설에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350만 평양시민들일 것이다. 그날 참석한 15만 평양시민은 아마 모르긴 해도 난생 처음 남쪽 대통령의 육성 연설을 들었을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평양 시민들 사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5.1 체조경기장 연설 내용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RFA)이 현지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 15만 평양 군중이 기립박수로 열렬히 환호하고 나서자 당황한 북한 당국은 몰래 여론 동향을 살피고 있다고 현지 소식통들이 전했다는 것이다. 

능라도 5.1 체조경기장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날 모인 15만 평양시민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하는 이른바 ‘1호 행사’ 참가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평양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아니고 처음부터 엄격히 선발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얘기를 그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할 경우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라는 사실을 북한의 사법당국도 모를 리 없다.
 
아무튼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두고 지금 평양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북한 인민들에게 한 격려의 말은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 중간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에 대해 강원국 전북대 초빙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은 주로 쉽게 설명하는 연설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주장하는 연설인데 반해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은 이 두 가지에다 감성을 추가해 이들이 잘 배합된 연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문 대통령의 연설은 훗날 두고두고 연설의 모범으로 남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9.27,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 밑에서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주민들을 격려하면서 ‘자주’(自主)라는 단어를 언급한 부분을 두고 ‘대단한 결심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경험으로 보아도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들도 ‘자주’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결코 자유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 앞부분에서 “우리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남북관계를 전면적이고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강원국 교수는 또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 중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는 문구는 북한 주민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강원국 교수는 ‘당신들(북한주민들) 고생한 거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5.1 체조경기장 연설은 비록 7분간의 짧은 연설이었지만 1분에 두 번 꼴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명연설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그것도 적지(敵地)의 심장부에 들어가 상대편 군중들에게 평화를 외치고 번영을 다짐한 역사적인 명연설이 아닐 수 없다.

흔히 명연설이 되기 위한 3대 조건으로 ▲연설내용(콘텐츠) ▲청중 ▲시대정신을 꼽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이 세 가지를 다 만족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비록 2분 남짓 밖에 안 되는 초미니 연설이지만 역사적인 명연설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배경 때문이다.    

2017년 5월 대통령 취임 직후 광주 망월동에서 한 연설이 5.18 유가족들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었다면, 이번 평양 능라도 5.1 체조경기장 연설은 평양 시민들의 가슴에 평화와 번영의 가능성을 심어주었고, 겸손하고 진솔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미지를 뚜렷이 남겨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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