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日 기업, 강제징용 피해자에 1억씩 배상”… 13년8개월 만 결론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판결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005년 2월 처음 소송이 제기된 지 13년 8개월이 지나서야 끝을 맺은 것. 이 기간 소송 당사자 4명 중 3명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의 압력 또는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로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다만 대법원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선고문을 읽는 것 외 재판 지연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진 않았다.

◇ 최악의 재판으로 남을 강제징용 대법원 선고

30일 오후 2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춘식(94) 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각 1억원의 위자료와 그에 따른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현재 이 사건 원고 4명 중 생존자는 이씨뿐이다. 이들은 1941~1943년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에 강제징용돼 노역에 시달렸으나 임금을 받지 못했다. 소련군의 공습으로 공장이 파괴되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고(故) 여운택 씨와 신천수 씨가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금과 임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고 2003년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다. 2005년 이들은 결국 국내 법원에도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해 처음으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배상청구 권리’는 살아있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우리 법원 1·2심은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음해인 2013년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도 대법원 판시에 따라 신일본제철이 각 1억원씩 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신일본제철은 즉각 재상고했고, 그때부터 대법원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건을 방치했다.

불과 1년 전 대법원이 스스로 배상 판결을 내렸던 만큼, 대법원의 재판 지연행위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 5년이 지난 올해 사법농단 의혹이 터지면서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됐다. 지난 5월 25일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조사보고서’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와 청와대가 일부 사건들과 관련해 교감이 의심되는 정황이 담겨있었다.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해서는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사건에 대하여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판결 기대할 것으로 예상”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러면서 청와대의 최대 관심사는 한일우호관계 회복이라며 “원론적 차원에서의 법원의 협조 노력 또는 공감 의사 피력”이라고도 했다.

지난 5월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청와대가 재판과 관련해 부적절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담긴 문건 일부.
지난 5월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청와대가 재판과 관련해 부적절한 요구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담긴 문건 일부.

◇ 반발한 일본… 실제 배상 받을 수 있을까?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본 법원의 판결은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에 비춰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 원심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청구권 시효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 식민지배 및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이라며 “강제동원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던 일본의 판결은 강제동원을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와 정면충돌해 국내에서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이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린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승소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기업이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린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승소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뉴시스

이날 선고는 일본에서도 관심이 뜨거웠다. 일본 방송사들은 이씨가 대법원에 들어오는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대법원이 취재 편의를 위해 마련한 24석 규모의 회견실을 마련했지만 자리가 부족해 1호 법정을 임시로 개방하기도 했다.

승소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피해자들이 실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강제로 징수하기 위해선 국내 재산이 있어야 하지만, 일본 기업이기 때문에 그 여부도 다시 확인을 해야 한다. 또 국내 재산이 없더라도 일본 법원으로부터 강제징수와 관련해 승낙을 받을 순 있지만, 이미 일본 법원이 패소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이 사건 변호인, 시민단체들은 배상에 앞서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실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한 사례는 없지 않다. 2015년 기무라 히카루 미쓰비시 미티리얼 상무는 로스앤젤레스의 미국 유대인 인권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 제임스 머피를 만나 직접 사과했다.

이에 이번 재판에 따라 일본 기업의 반응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 법원에는 일제 강제징용 등과 관련해 미쓰비시 중공업과 주식회사 후지코시, 요코하마고무, 스미세키홀딩스(옛 스미토모석탄광업) 등을 상대로 한 사건이 13건 남아 있다.

다만 일본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는 “이번 판결은 한일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저부터 뒤엎는 것”이라며 “국제 재판을 포함해 여러 선택지를 시야에 두고 의연한 대응을 강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