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29) 씨가 치료감호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난 10월 22일 오전 서울 양천구 양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시사위크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29) 씨가 치료감호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난 10월 22일 오전 서울 양천구 양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시사위크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당초 취지는 ‘국정 현안’ 관련 청원이었다. 하지만 지난 26일 기준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로부터 답변을 받은 68개 청원 중 34개 청원은 형사사건 관련 민원이었다. 이중에는 범죄피해 당사자나 가족이 올린 청원은 물론 특정 범죄의 형량을 강화해달라거나 미해결 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글, 의료사고도 포함돼 있다. 특히 조두순 출소 반대 청원은 두 번이나 20만 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현재 최다 동의를 받은 청원 글 역시 119만 명의 동의를 얻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57호)’ 관련 청원글이다. 해당 글은 심신미약 감형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심신미약에 대한 청원글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청원글 이전에도 있었다. 청와대 답변 3호 역시 ‘주취 감형’ 폐지를 촉구하는 청원이었다. 결국 심신미약 감형 폐지 청원도 조두순 출소반대 청원과 마찬가지로 두 번이나 20만 명의 동의를 얻은 셈이다.

눈여겨 볼 것은 형사사건 청원글의 비율이 최근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이다. <시사위크>가 청와대 청원 답변을 분석한 결과 1호부터 46호까지 답변 중 형사사건 관련 청원은 13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머지 47호부터 68호까지 22개 답변은 모두 형사사건 청원에 대한 답변이었다. 사안에 대한 유의미한 답변 여부를 떠나 앞으로도 이 같은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청와대 청원게시판의 실효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많지 않거니와 자칫 삼권분립 위배 논란까지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사건 청원글은 우리 사회 의미 있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청원게시판 개편을 준비하고 있는 청와대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법안 이끌어낸 시민들, 청원게시판 저력 증명
하나마나 한 답변도... 법안 통과 못하면 무용지물?

20만 명의 동의를 받은 청원글 중 실제 괄목할 만한 결과를 끌어낸 사안도 많이 있었다. 재수사와 관련해서는 장자연 씨와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이 검찰의 재조사를 받고 있다. 또한 웹하드 카르텔과 디지털 성범죄(리벤지 포르노 범죄 포함)의 특별수사 및 강력 처벌 역시 사회적 공감대를 얻고 있다.

강서구 PC방 살인 사건도 심신미약 감형 폐지까지 이뤄지진 않았지만, 심신미약 감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압력이 법원 전반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아울러 PC방 살인 사건 피의자인 김성수는 해당 청원이 논란을 낳으면서 정심감정까지 받게 됐다. 마찬가지로 강서구에서 발생한 전 처 살인사건 관련 청원(강서구 아파트 살인사건 피해자의 딸입니다) 또한 가정폭력 범죄의 경각심을 울렸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딸들이 아버지의 사형을 촉구, 더욱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딸들은 국회에도 출석해 가정폭력 범죄의 강력 처벌을 호소했다. 결국 지난 11월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와 법무부, 경찰청은 합동브리핑을 열고 피해자 안전 보호와 가해자 처벌강화 및 재범방지, 피해자 자립지원을 위한 과제들을 수립했다. 이에 따르면 앞으로 가정폭력 가해자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고 접근금지 명령을 어길 시 최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가정폭력범의 현장 체포는 과거에도 수차례 논의가 돼왔지만 매번 논의만 이뤄진 채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민들의 목소리가 모아지면서 매우 신속하게 대책이 마련된 것이다. 음주운전 가해자의 처벌 강화를 촉구했던 고(故) 윤창호 씨 친구들의 청원 역시 20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통과된 법안은 당초 윤 씨 친구들이 요구했던 수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음주운전 가해자의 처벌강화를 끌어낸 것은 평가받을 일이다.

지난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음주차량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진 윤창호(22) 씨의 친구들이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과 음주운전자 처벌기준을 강화하는 '윤창호법'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0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음주차량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진 윤창호(22) 씨의 친구들이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과 음주운전자 처벌기준을 강화하는 '윤창호법'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정론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백혜련, 위성곤 의원과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등 관계자들이 가정폭력처벌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정론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백혜련, 위성곤 의원과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등 관계자들이 가정폭력처벌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물론 모든 청원글이 성과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조두순 출두반대의 경우 ‘현행법상으로는 방법이 없다’는 게 주요 답변 내용이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두 번이나 2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동의를 한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소년법 개정을 촉구하는 청원글은 무려 세 번이나 20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와대 청원 답변 1호는 소년법 폐지를 촉구하는 글이었다.

소년범죄인 역시 성인과 같은 형량을 내려달라거나 혹은 처벌 면제 대상인 형사미성년 연령을 낮춘다든지 미성년 성범죄자는 처벌을 강화해달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중 아직까지 실제 법안 개정을 끌어낸 청원은 없는 실정이다. 입법은 원칙적으로 국회의 권한인데다 정부 입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소년법 개정의 경우 심도 깊은 논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주요 이슈에만 몰두하는 행정력이 낳은 문제”

앞으로도 조두순과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종신형을 촉구하는 청원이나 소년법 청원글은 계속 올라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청와대로서는 원칙적으로 앞서 답변한 청원과 비슷한 내용일지라도 답변을 해줘야 한다. 즉, 청원자 및 동의자들과 청와대 간의 지루한 릴레이가 반복될 우려도 없지 않다.

청원게시판에 범죄 피해자들이 몰리는 현상과 원인에 대해서도 정부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청원 게시판 기능의 기관별 분산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법절차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은데 높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라며 “많은 시민들이 동의를 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가 이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이는 우리 국가기관이 정권에 눈치를 심하게 보거나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안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여온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면서 “차라리 중요한 문제들은 아예 입법화 시키고, 사법부에 할 얘기는 법원에 할 수 있도록 국회와 사법부에도 적절한 청원을 할 수 있는 기능이 부여되는 편이 낫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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