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고 짓고’는 오랫동안 우리 건축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낡은 건물이 있으면 깨끗이 밀어버린 후 최신식 건물을 올리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이제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문화생활과 휴식, 친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기능을 잃은 산업시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에선 이제 막 기지개를 켠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의 현주소를 <시사위크>가 살펴봤다. [편집자주]

기능을 다한 건축물을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하는 재생사업은 한국에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사진은 대전차방소시설을 리모델링해 17년 10월 문을 연 서울 도봉구의 평화문화진지./ 뉴시스
기능을 다한 건축물을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하는 재생사업은 한국에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사진은 대전차방소시설을 리모델링해 17년 10월 문을 연 서울 도봉구의 평화문화진지./ 뉴시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지난 2016년 7월, 산업통상자원부는 30년 이상 가동된 노후 석탄발전소 10기를 오는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 네 곳은 연료를 바이오매스·LNG 등으로 전환해 발전소로서의 기능을 이어나가는 방안이 확정됐거나 검토 중이다. 나머지 6곳은 2021년까지 모두 폐쇄될 계획이며, 이미 문을 닫은 곳도 있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발전소들이 남긴 빈자리는 어떻게 될까. 2017년 6월 문을 닫은 서천화력발전소 1·2호기가 있던 자리에서는 신서천화력발전소의 건설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2020년 폐지가 예정된 삼천포화력발전소, 그리고 2021년에 폐지될 호남화력발전소의 경우 아직 시설 및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이 공개적으로 논의된 바 없어, 모두 서천화력발전소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대기오염과 미세먼지를 이유로 발전소가 폐쇄된 자리에 들어선 것이 또 다른 화력발전소라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현재 진행 중인 친환경정책의 한계, 그리고 아직까지 폐산업시설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 범위도 규모도 협소

한국도 정부 주도로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을 활성화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지난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시작한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지원사업’이 그것이다. 매년 지역자치단체들로부터 사업계획안을 제출받고, 선정된 사업에 대해 예산의 50%를 지역발전특별회계에서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지원사업’은 현재까지는 운영상의 미숙함과 태생적 한계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재건축 목적이 획일적이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22개 사업 중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은 모두 16개다. 이 가운데 버려진 공장과 창고, 소각장 등을 지역주민에 대한 교육시설과 전시장·공연장·창작공장·세미나실 등을 갖춘 문화센터로 개조한 사업이 14개며, 대학캠퍼스를 청년문화공간으로 조성한 사업까지 합하면 15개 사업이 문화센터 건설이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업규모가 충분히 크지 못해 재생사업으로 선정되는 주체의 범위가 협소해지는 한계도 있었다. 각 사업별 지원금 규모는 대부분 10억원에서 30억원 사이였으며, 2016년에 추진됐던 6개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지원된 정부 예산은 모두 96억5,000만원이었다. 서울시가 마포구의 석유비축기지를 문화비축기지로 개조하는데 470억원, 서울역전의 고가도로에 산책로로 조성하는데 597억원의 예산을 사용했다는 점에 비춰보면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대형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했던 셈이다. 자연스레 리모델링 대상은 메인 건물 한두 채와 근처 부지로 국한됐다.

◇ ‘재생’ 아닌 ‘재활용’에 불과

가스공장을 친환경 문화공원으로 되살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베스터 가스공장 문화공원. /베스터 가스공장 문화공원 홈페이지
가스공장을 친환경 문화공원으로 되살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베스터 가스공장 문화공원. /베스터 가스공장 문화공원 홈페이지

건축학에서 ‘장소’는 단순한 위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명확한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적인 뜻은 다음과 같다: 건축은 장소의 특성을 시각화하며, 건축물 하나하나에는 점유하고 있는 장소 자체는 물론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장소에 대한 느낌이 덧칠돼있다. 즉 ‘장소성’이란 장소의 물리적 특징과 이미지, 그리고 그 장소에서 사람들이 일으키는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의 의의는 건물이 갖고 있던 장소성은 그대로 담아내면서 새로운 목적성을 불어넣는다는데 있다. 건물을 완전히 헐어버리는 대신 외관을 유지한 채 보수작업을 진행하고, 새로 세운 건축물 내부에 옛 산업시설의 흔적을 남겨두는 것은 하나의 건축물이 쌓아올렸던 장소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재생사업이 아니라 단순히 건물을 재활용하는데 그쳤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역자치단체의 신청을 받아 자금을 지원했던 문화재생사업 16개 중 15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 중 리모델링 후에도 옛 흔적을 간직하는데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장소성에 대한 고민 없이 전시실을 확보하는데 급급하거나 ▲문화재생 목표 수립보다 건물 리모델링이 선행됐으며, ▲사업을 주관하는 업체와 문화재생계획의 특성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문화재생사업이라 하더라도 장소성에 대한 고민을 녹여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네덜란드의 베스터 가스공장 문화공원은 검은 연기를 내뿜던 가스공장단지를 친환경 문화공원으로 탈바꿈시켰으며, 이탈리아 볼로냐의 문화예술지구에는 아직도 제빵소와 도축장, 담배공장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여기에 비춰보면, 진정한 의미의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은 한국에선 아직 시작하지 않은 셈이다.

◇ ‘거버넌스’에서 드러난 약점

경기도 파주의 캠프 그리브스는 유명 드라마의 촬영지로 인기를 모은 관광지다. 그러나 문화재생사업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뉴시스
경기도 파주의 캠프 그리브스는 유명 드라마의 촬영지로 인기를 모은 관광지다. 그러나 문화재생사업으로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뉴시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17년 1월 발표한 컨설팅 보고서에서 2015‧16년 동안 진행된 9개 문화재생사업들의 사업진행과정 전반을 평가한 결과, ‘추진체계구성’과 ‘거버넌스 구성‧유지’ 항목의 평균점수가 가장 낮았다고 밝혔다. 9개 사업 중 추진체계구성 평가에서 3점 아래의 평가를 받은 곳이 5곳, 거버넌스 구성‧유지 평가에서는 6곳에 달했다. 즉 사업 전반을 주관하는 총괄기획자의 선정부터 시작해서 사업추진조직을 구성하고 사업계획서 평가 및 예산 심사를 담당하는 정부부처와 협업하는 과정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군주둔지를 안보전시관 겸 유스호스텔로 개조한 경기도 파주의 ‘캠프 그리브스’는 문화재생사업에 대한 낮은 이해도와 운영상의 미숙함 때문에 좋은 소재를 살리지 못한 사례로 뽑힌다. “장소가 가지는 가치가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가치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아 정상적인 사업 진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컨설팅 보고서에서 캠프 그리브스 사업에 내린 평가다. 사업추진을 맡은 경기관광공사가 문화재생보다는 관광을 목적으로 사업계획을 구성하고, 예산이 그대로 집행되면서 민통선 내의 미군기지라는 장소의 의미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사업추진 방향성을 두고 기획단과 문체부, 지역주민‧문화예술인들이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등 관리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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