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고 짓고’는 오랫동안 우리 건축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낡은 건물이 있으면 깨끗이 밀어버린 후 최신식 건물을 올리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이제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문화생활과 휴식, 친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기능을 잃은 산업시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에선 이제 막 기지개를 켠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의 현주소를 <시사위크>가 살펴봤다. [편집자주]

 

바닷가 반대편에서 바라본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모습. 한국수력원자력은 2018년 6월 월성 1호기의 조기폐쇄를 결정했다. /뉴시스
바닷가 반대편에서 바라본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모습. 한국수력원자력은 2018년 6월 월성 1호기의 조기폐쇄를 결정했다. /뉴시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건물에도 수명이 있다. 전통적으로 건축물의 제1 사망원인은 폭발과 철거, 방화를 비롯한 물리적 파괴였다. 자연히 건축가들은 작업물의 내구성을 높이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문명화가 진행되고 건축기술이 발달한 지금, 지구 위 대부분의 지역에서 반달리즘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 건축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이전보다 몇 배나 빨라진 사회의 변화 속도다. 모든 건축물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세워지며, 어느 순간이 되면 같은 기능을 더 안전하고 빠르게 수행하는 최신 건물들에게 자리를 내 주게 된다. 한 해 한 해를 보내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건축물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다.

산업시설은 주거용 건물이나 문화예술 공간에 비해 세대교체의 주기가 훨씬 짧다. 한 산업계가 쇠퇴하기 시작하면 관련 산업시설들은 수익성이 악화돼 경영이 불가능해지거나, 이전까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환경·안전 이슈들이 터져 나온다. 19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에 우후죽순으로 건설됐던 석탄발전소들은 주류 발전연료가 천연가스로, 원자력으로, 재생에너지로 바뀌면서 상당수가 제 역할을 잃었다. 탄광과 방직공장, 구식 제철소도 대표적인 ‘시대에 맞지 않는’ 산업시설들이다.

경제적 활용도가 없어져 방치된 산업시설들을 철거하는 대신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은 근대 산업이 가장 먼저 발달한 서유럽에서 싹텄고, 이제는 국제적인 유행이 됐다. 산업의 발전과 경제적 이윤이라는 본기능은 후배 건축물들에게 물려주고 예술과 휴식,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건축폐기물을 최소화한다는 환경적 의미와 철거·재건축비용을 절약한다는 경제적 의미뿐 아니라 산업시설이 쌓아온 역사를 간직한다는 정서적 의미도 있다. 재생사업을 계획하는 건축가들은 대부분 산업시설의 외형을 유지해 시민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건물과 얽힌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때로는 혐오시설로 분류되는 산업시설들도 결국 지역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주민들과 상호작용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 ‘경영난’ 발전소가 런던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의 모체는 경영난에 문을 닫은 화력발전소다.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의 모체는 경영난에 문을 닫은 화력발전소다.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영국 런던의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은 폐산업시설 재생사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성공사례로 손꼽힌다. 2001년 1월, 20년 전에 폐쇄된 발전소를 재단장해 문을 연 이 미술관은 장기적으로 5,000만유로 정도의 수익을 올릴 것이라던 시공 전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다. 테이트 그룹이 2018년 3월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테이트모던을 찾은 관람객 수는 820만명에 달한다. 미술관이 전시한 미술품의 가치를 모두 합하면 2,250만유로, 이 중 대부분의 작품들을 무료로 공개하면서 올린 순이익이 480만유로다. 한편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에 기여한 효과는 1,100만유로 가량으로 추정된다.

현대미술관의 시작은 런던 도심부 한가운데에 위치한 화력발전소의 경영난이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간 1,300GWH에 달했던 뱅크사이드 발전소의 전력생산량은 오일쇼크와 장비 노후화가 겹치면서 1980년엔 9.6GWH까지 떨어진다.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게 된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결국 이듬해 문을 닫았다.

발전소가 폐쇄되자 런던의 도시계획설계자들은 철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3개 동의 가로길이를 모두 합하면 200미터에 달하는 규모에,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바로 옆, 템스 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산업시설을 방치한다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이라는 도시설계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뱅크사이드 발전소가 90년 동안 런던에 전기를 공급하고 견습공들을 육성하면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건물이 됐다는 점이다. 시청에는 발전소 건물을 보전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빗발쳤고, BBC는 뱅크사이드 발전소와 런던 시민들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결국 런던 시는 건물의 기본 구조를 변경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 발전소를 경매에 붙인다. 인수에 나선 것은 발전소를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하겠다는 두 건축가의 설계도를 손에 쥔 테이트 그룹이었다.

전시실이 된 터빈홀(왼쪽)과 전망대가 된 발전실 굴뚝(오른쪽).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전시실이 된 터빈홀(왼쪽)과 전망대가 된 발전실 굴뚝(오른쪽). /테이트모던 홈페이지

뱅크사이드 발전소 재생사업을 지휘한 건축가 자일스 길버트 스콧은 건축물의 내·외관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를 구성하던 많은 공간들은 지금도 옛 흔적을 간직한 채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보일러실은 주 전시장으로, 발전기가 있던 터빈 홀은 설치예술가들을 위한 초대형 전시장으로 변신했으며 2012년에는 과거 오일탱크들이 들어서있던 지하 공간이 공연예술 무대로 개조돼 첫 선을 보였다. 초현실주의와 큐비즘, 전위예술 등 실험적인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현대미술관에 어울리는 무대인 동시에 지역 시민들에겐 오래된 발전소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이 된 셈이다.

◇ 가정과 일터, 문화휴식 공간까지 품은 가스저장소

붉은 벽돌로 건축된 가스저장소 외벽은 리모델링 후에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위쪽). 아래쪽은 주택으로 개조된 C동의 모습. /가소메터시티 홈페이지
붉은 벽돌로 건축된 가스저장소 외벽은 리모델링 후에도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위쪽). 아래쪽은 주택으로 개조된 C동의 모습. /가소메터시티 홈페이지

오스트리아 빈의 11번가, 남동쪽 외곽지역에 위치한 짐머링 구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9만세제곱미터 크기의 가스저장소 4동이다. 높이 70미터, 지름 60미터의 거대한 원형 건축물인 이 저장소들은 1899년에 건설됐으며, 오스트리아가 석탄 대신 천연가스를 발전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할 때까지 80년 넘게 빈 전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폐쇄된 가스저장소를 역사기념물로 지정해 훼손을 막은 빈 시의회는 이후 공모전을 열어 가스저장소 재생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집했다. 당선된 네 명의 건축가는 가스저장소 외벽을 보존한 채 내부를 주거시설로 개조하자는 의견을 냈고, 이들이 제출한 네 장의 설계도에 따라 공사가 진행됐다.

빈 시민들에게 생활 연료를 공급하던 ‘가소메터(가스탱크를 의미하는 독일어)’는 이렇게 그 자체로 생활공간인 ‘가소메터 시티’로 다시 태어났다. 오늘날의 가소메터 시티는 빈을 찾는 여행객들이 한 번씩 들리는 관광명소인 동시에 1,600여명의 주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는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는 개인주택‧공동주택‧임대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거주시설 600여호와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250호가 들어서 있으며,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과 영화관, 70개가 넘는 상점과 사무실들이 입주해 내부에서 거의 모든 일과를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다. 재생사업을 설계했던 건축가들은 각 동마다 안뜰을 조성해 주민들이 녹지를 거닐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D동 아파트와 안뜰의 모습. /가소메터시티 홈페이지
D동 아파트와 안뜰의 모습. /가소메터시티 홈페이지

건축물의 외관을 최대한 유지한다는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의 원칙은 가소메터 시티에도 적용됐다. B동 한쪽 벽면에 위치한 기숙사 건물을 제외하면, 가소메터 시티를 구성하는 4개 저장소의 붉은빛 외관은 1899년 가스저장소가 처음 건설될 당시 그대로다. 물론 이는 가스저장소라는 산업용 건물을 지으면서도 도시 경관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폐산업시설 재생사업,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테이트모던과 가소메터 시티는 화력발전소와 가스저장소를 예술과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한 사례다. 그렇다면 산업시설 중에서도 외부와 가장 철저히 격리돼있는 원자력발전소는 어떨까.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 6월 월성 1호기의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판단 하에 조기폐쇄 결정을 내렸다. 발전량이 낮고 폐기물처리비용은 막대해 운행하면 할수록 적자가 늘어난다는 조사 결과가 근거였다. 월성 1호기는 2022년 11월을 기점으로 가동이 완전히 중단될 예정이지만, 아직까지 발전소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선 계획이 수립돼있지 않다.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섰던 부지, 혹은 원자력발전소 건물 자체를 재활용하기 위해선 화력발전소나 가스저장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오랜 작업이 필요하다. 원자력위원회는 지난 2016년 10월 제정한 ‘원자력이용시설 해체완료 후 부지 및 잔존건물의 재이용을 위한 기준’에서 방사능 피폭선량이 연 0.1mSv를 초과하지 않을 경우 원자력발전소를 재생사업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해외 사례에 비춰보면 가동 중지 후 발전소 내에 남아있는 핵연료를 인출한 후 제염작업을 통해 방사능을 제거하고, 원자로를 비롯한 주요 장비들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련의 작업들에는 대개 10년에서 15년 정도가 소요된다.

원자력발전소는 대개 그 지역의 주 수입원인 경우가 많다. 전기를 이용하는 산업체들이 인근에 입주하고, 고용도 늘어난다. 한 때 방사선이 노출되던 장소라는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원전 부지를 내버려둘 경우 지역경제에는 큰 문제가 된다. 

한때 100여개에 달하는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며 세계 최대의 원전국가로 불렸던 미국은 지난 2000년대 후반부터 자국 내 원자력발전소들을 하나 둘 폐쇄해나가고 있다. 원전 건설비용이 치솟으면서 생산성이 떨어진 반면 재생에너지와 천연가스 등 경쟁 연료들의 활용률은 높아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원자력발전소 부지를 활용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비록 ‘보너스 원자로’를 역사박물관으로 개조하고 민간에 공개하겠다는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해당 부지는 현재 폐허나 다름없이 방치된 상태다), 폐쇄된 원자력발전소를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시도 자체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중이다.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노후한 원자력발전소의 문을 닫는 작업에 착수한 한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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