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CPTPP 논의를 위해 모인 11개국 대표들. /뉴시스·신화
작년 3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CPTPP 논의를 위해 모인 11개국 대표들. /뉴시스·신화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11개 국가가 참여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2018년 12월 31일을 기해 발효됐다. 참가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하면 5억5,000만명에 달하며, GDP 총합은 10조5,000억달러(전 세계 GDP의 약 14%)로 미국·멕시코·캐나다 자유무역협정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다자무역협정이다. 현재 일본·싱가포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멕시코의 6개 국가가 의회 비준을 마쳤으며 베트남도 오는 14일까지 비준을 마칠 예정이다.

◇ 미국의 빈자리를 넘보는 일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7년 1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을 위한 협상에서 탈퇴했다. TPP가 자국 제조업계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판단이 근거였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산업계가 TPP 탈퇴 결정을 반긴 것은 아니다. 피터슨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TPP 탈퇴 결정은 연 1,310억달러의 순수익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축산협회는 작년 12월 초 성명서를 발표하고 CPTPP에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정부가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는 미국 소고기 산업계는 시장을 잃을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 축산협회가 발표한 성명서의 핵심이다. 일본은 미국산 소고기가 가장 많은 수출기록을 올리고 있는 시장이지만, CPTPP가 발효되면 판매가가 이전보다 27.5% 떨어진 오스트레일리아산 소고기가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게 된다.

밀 농업은 또 다른 희생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CPTPP 하에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농부들은 일본에 밀을 기존 가격보다 7%까지 낮게 팔 수 있다. 미국 밀 산업협회의 빈스 피터슨 회장은 작년 12월 31일(현지시각) C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산 밀은 일본 시장에서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 비해 1톤당 14달러의 불이익을 안게 될 것”이며, 이것이 “재앙의 임박”이라고 강변했다.

최근 미국은 중국·유럽연합과 자동차·철강·알루미늄 관세장벽을 쌓는 등 무역시장을 넓히는데 애를 먹고 있다. 반면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고 있는 미·일 FTA 체결을 밀어내는 한편, 미국이 협상 테이블을 떠난 이후 무산될 위기에 처했던 TPP를 부활시키는데도 성공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CPTPP를 외교적 성과로 선전하는 동시에 미국을 다시 협정에 포함시키기 위한 대화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오는 2월 1일부로 세계 최대 양자 자유무역협정인 일본·유럽연합 FTA가 발효되면 일본은 관세의 99%를 면제받은 채 유럽연합에 상품을 수출할 수 있게 된다. CPTPP와 유럽연합 FTA를 마무리한 일본의 다음 과제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될 전망이다. 캐나다·멕시코 등 북아메리카 국가 대신 한국·중국·인도가 참가하는 RCEP는 참가국의 GDP를 모두 합하면 25조4,000억달러로 CPTPP의 약 2.5배에 달한다.

◇ 한국, CPTPP 대신 RCEP에 무게

한국이 CPTPP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과 FTA를 맺지 않고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은 일본에 306억2,500만달러를 수출했는데, 수입액은 545억8,800만달러에 달했다. 석유수입이 대부분인 중동을 제외하면 주요 지역 중 한국이 무역적자를 내고 있는 곳은 일본과 유럽연합뿐이며, 대 일본 무역적자는 유럽연합과의 무역에서 보는 적자(약 45억달러)의 5배가 넘는다.

CPTPP에 참가한 11개국 중 한국과 FTA를 맺지 않고 있는 곳은 일본과 멕시코뿐이다. 한국에게 CPTPP는 멕시코 수출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기회인 한편,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가중평균관세율은 4.26%인데, 일본의 대 한국 가중평균관세율은 1.20%다. 일본은 한국의 주력 수출업종인 제조업에 대해 3% 이하(의류·직물·가죽제품 제외)의 낮은 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특히 기계류에 대해선 이미 대부분의 제품에 대해 관세를 설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은 한·일 FTA가 발효될 시 기계·전자기기 교역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한·중·일 FTA는 각국의 의견 차이로 협상이 6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CPTPP는 한·중·일 FTA보다도 시장개방률이 더 높아 접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협상이다. 정부는 작년 관계부처 회의·전문가 포럼·업계 간담회 등을 열어 CPTPP 가입 여부를 의논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중국·인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RCEP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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