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민생경제연구소 공동기획

소처럼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는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민생 경제’ 위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귀결될 수 없다. 다양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중에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각종 불공정한 시스템도 중심축 역할을 한다. <본지>는 시민활동가인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주요 민생 이슈를 살펴보고,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편집자주]

1,000여개의 중소기업을 도산 위기로 몰았던 키코 사태가 올해는 사태 해결의 물꼬를 틀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뉴시스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어느덧 11년째다. 수많은 수출 중소기업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금융파생상품 키코(KIKO) 사태가 발생한 후 흘러간 시간이다. 키코란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파생상품이다. 환헤지를 대비할 수 있다는 은행의 말만 믿고 덜컥 가입했던 중소기업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폭등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 이후 피해기업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분투를 이어왔다. 키코 상품 자체가 애초 불공정하게 설계됐으며, 은행들이 ‘사기 판매’를 했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호소를 제대로 들어준 정부 기관은 없었다. 2013년 대법원이 은행의 손을 들어주면서 모든 희망은 완전히 사그라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키코사건은 현재 다시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상태다. 금융적폐 사건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지난해부터 금융감독원이 키코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돌입해서다. 최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함께 조붕구 키코피해기업공동대책위원장을 만나 그 의미를 짚어봤다.

◇ 10년간의 분투 “진실규명, 포기하지 않아” 

“처음에는 회사를 폐업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진실이 묻혀버릴 것 같았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키코피해기업공동대책위원회(이하 키코 공대위) 사무실은 찾았을 때 조붕구 위원장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되새겼다. 그러면서 처음 키코 상품을 가입하게 된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가 운영하는 코막중공업은 키코 가입 전까지만 해도 건실한 건설 장비업체였다. 이 회사가 제조한 중장비는 해외 수십개국에 수출됐고 2007년까지만 해도 매출이 135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그해 말 환위험을 관리해주는 좋은 상품이 있다는 말을 믿고 키코에 가입했다가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난 2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우측)과 조붕구 키코피해기업공동대책위원장을 만나 키코사태 10년을 돌아봤다./시사위크

키코는 원-달러 환율(아래 환율) 변동폭이 클 때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이면 미리 정한 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는 파생금융상품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 수출 기업이 약정액 100만 달러를 1달러당 △약정환율 1,000원 △하한 950원 △상한 1,050원으로 정해 은행과 계약을 했다면, 만기시 환율이 970원으로 내려가더라도 약정환율 1,000원을 적용받아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또 만기시 환율이 1,000원에서 1,050원 사이에 해당할 때는 시장가격에 매도할 수 있다. 이 경우 시장환율이 약정환율보다 높을 경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환율이 정한 구간을 벗어났을 때다. 환율이 하한 이하로 내려가면 계약이 무효가 돼 환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상한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더 큰 손실을 입는다. 당시 은행들은 키코 상품을 판매하면서 상한 이상으로 오를 경우, 약정금액의 2배 이상으로 팔아야 한다는 옵션을 붙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폭등하면서 계약한 돈의 2배 이상을 물어주게 된 700여 개 중소·중견기업들이 큰 손실을 보거나 파산했다. 금감원의 2010년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738곳이 3조원이 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키코 공대위가 파악한 손실은 이보다 훨씬 크다. 1,000여개의 기업이 10조원 가량의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됐다.

◇ 차가운 외면 속에서 10년 "그래도 버텼다"   

조 위원장의 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코막중공업은 키코사태 여파로 186억원의 손실을 내며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100명이 넘던 직원이 20명으로 줄어들었다. 돈이 될만한 자산은 다 매각을 해야 했다. 회사의 폐업까지 고민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다.

조 위원장은 “집에 빨간딱지가 붙는 상황도 당해봤다”며 “회사 문을 닫고 다시 시작할까도 고민했지만, 그러면 모든 진실이 묻힐 것 같았다. 주위로부터 그냥 정리하라는 말도 들었지만 고집을 부렸다. ‘돈을 벌고 안 벌고’의 문제가 아니였다. 키코사건은 국가의 기틀인 신뢰와 관련된 문제였다.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면 사회적 분열과 부작용을 더 낳을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기업 경영진들과 함께 2008년 대책위를 꾸리고 공동 대응에 나섰다. 우선 이들은 키코 상품이 애초에 불공정하게 설계됐다고 주장했다. 기업에게 돌아갈 이익은 제한돼 있고, 손해는 무한대로 늘어나도록 설계된 게 문제점으로 지목됐다. 또 은행이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사기판매했다고 주장했다.

피해기업들은 검찰, 법원,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모든 정부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이었다. 이들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검찰은 소극적인 대처로 일관했다. 판매은행 압수수색영장은 줄줄이 기각됐다. 공정위와 금감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주는 판단을 내렸다. 2013년 대법원이 키코 판매는 불공정 거래 행위가 아니라고 판결하면서 이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앗아갔다.

조붕구 위원장은 "올해는 키코사건의 사태해결을 위한 결실이 있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시사위크

조 위원장은 당시를 “그야말로 절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법원 판결 후, 많은 피해기업들이 줄줄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며 “이로 인해 협력사들은 줄도산하는 등 피해가 엄청났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절망스러웠다”고 토로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안진걸 소장은 “수출역군이었던 그 많은 기업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무너졌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말이 되냐”며 분노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안 소장은 키코사태가 발생한 후부터 키코 공대위와 함께 연대해 싸워왔다. 안 소장은 키코사건을 최악의 사기판매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는 “위험방어 상품이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상품 가입 과정, 구성, 원리 등 모든 게 사기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이 사건은 단순한 불완전판매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안 소장은 “이전까지 정부와 사법당국은 불완전판매에만 포커스를 맞춰 바라봤다”며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상품설명이 부족했다는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상품 설계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키코와 비슷한 금융파생상품에 대해 미국과 이탈리아 등 해외국가가 계약 원천 무효 판결을 내린 점 역시 같은 근거를 가진다고 봤다.

◇ 꺼졌던 희망의 불씨 살아나다  

하지만 조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구두굽이 닳도록 발로 뛰면서 회사를 살리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키코 공대위 활동도 이어왔다.

그리고 2017년 정권이 바뀌면서 키코 사태의 꺼진 불씨가 살아났다. 지난 2017년 9월 정무위원회 소속이었던 박용진 의원이 “키코사태는 대표적인 금융적폐 사례”라고 지적하며 재조사를 촉구했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재수사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답한 것이다. 그해 말 금융위원장 직속 금융행정혁신위원회가 키코 사태에 대한 재조사를 권고하면서 키코사건이 다시 수면 위에 올랐다. 또 지난해 키코사건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농단과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키코사건 재조사는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6월부터 피해 기업 4곳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이다.

조 위원장은 지난해를 돌아보며 “키코사건이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고무적”이라고 기뻐했다. 다만 올해는 분명히 사태 해결의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조 위원장은 “전면 재조사를 통해 키코사태의 진상을 파헤쳐야 하고, 피해구제 역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키코 피해기업만 제대로 살려도 수출 성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위원장은 “키코상품으로 피해를 입은 1,000여개의 기업은 대부분 수출기업들이었다”며 “이들이 제대로 살아나 최소 1,000만달러 씩만 수출 실적을 낸다면 1년이면 100억 달러가 된다. 새로운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보다는 제대로 사업 노하우를 갖춘 기업을 회생시키는 게 빠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위원장이 운영하는 코막중공업은 법정관리에서 벗어나면서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그의 사무실 한켠에 있는 칠판에는 20여곳의 해외 거래선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사업을 운영하기는 어려움이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조 위원장은 “신용등급이 낮게 조정돼 있어 자금 조달이 힘들다. 이 때문에 장비를 만들고 해외에 납품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조만간 키코피해 기업에 대한 금감원의 조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고, 사태 해결의 물꼬가 트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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