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4 11:58 (수)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설에 생각하는 인생 “시간 리듬에 춤을 추자”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설에 생각하는 인생 “시간 리듬에 춤을 추자”
  • 시사위크
  • 승인 2019.01.29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농촌 출신이라 그런지 설 명절이 가까워지면 고향 생각이 많이 나네.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날 고샅과 들판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던 동무들 생각도 나고. 모든 게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또래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만큼은 매우 행복했었지. 끼니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도 몰랐고, 멀리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뛰어 놀았으니까. ‘공부’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있는 줄도 몰랐고, 전깃불과 바보상자도 아직 없었던 별만 많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마 요즘 청소년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함께 뛰어 놀던 동무들의 뜨거운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것을.

오늘은 예순 다섯 번째 설을 앞두고 점점 육체적으로 약해지는 나를 다시 한 번 다잡고 싶네. 마음으로나마 어린 시절의 그 뜨거웠던 숨결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고향에서처럼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이 이제 그만 들어오라고 부를 때까지 마냥 즐겁게 살다 가겠다는 약속을 다시 하고 싶어.

이순을 넘어 시작한 사진공부에 푹 빠져 살고 있다는 말은 자주 했지. 처음에는 좋아하는 꽃이나 잘 찍어두려고 시작했던 공부가 이제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해야만 마음이 편한 일과가 되어버렸네. 사진에 관한 책들을 사서 읽고 메모하고, 카메라 들고 사진 찍으러 다니고, 컴퓨터 앞에 앉아 찍어온 사진들을 후보정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사진가’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걸세. 물론 사진을 잘 찍는 ‘작가’는 아니고. 

사진 공부를 오래 하다 보니 내가 찍는 사진 하나하나가 잘 익은 김장김치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느 가정이든 맛있는 김치를 얻기 위해서는 싱싱한 배추뿐만 아니라 고추, 마늘, 생강, 파, 무, 갓, 젓갈 등도 미리 정성 들여 준비해야 하네. 1년 내내 온 식구가 먹어야 할 기본 반찬이니 허투루 담을 수 없지. 사진도 마찬가지야. 잘 익은 맛있는 김치 같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네.  

사진에 관한 이론적인 공부도 필요하고,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도 익혀야 하네. 빛의 성질도 알아야 하고, 스트로보 같은 인공 빛도 이용할 줄 알아야 자연광 없어 어두운 곳에서도 셔터를 누를 수 있어. 게다가 디지털사진이 대세인 요즘에는 포토샵도 다룰 줄 알아야 하네. 디지털시대에 포토샵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에 암실 작업을 직접 하지 않고 남에게 맡기는 것과 같아. 그러니 제대로 사진을 찍으려면 긴 준비 기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사진에서 ‘어떻게 잘 찍을 것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게 무엇을 찍을 것인가, 즉 주제와 소재야. 나는 내가 찍는 사진들을 통해 나를 찾으려고 하네.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장식해야만 이 세상 떠나는 날 즐거웠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모르고 있거든. 지금 내가 찍고 있는 셀피, 풍경사진, 스트레이트포토, 인물사진, 꽃사진 등을 통해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를 드러내고 싶네. 지난 5년이 그런 ‘나’를 찾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면, 올해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찾아 나설 작정이네. 그래서 설 쇠고 나면 어렵게 만난 선생님과 새로운 기분으로 사진 공부를 다시 시작할 거야. 

내가 왜 이렇게 꽤 길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이 가나? 나이 든다고 기죽지 말고, 씩씩하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는 뜻이야. 되돌아보면, 나에게 지난 5년은 잘 익은 김장김치 같은 사진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직접 체험한 기간이었네. 물론 60살을 넘긴 나이라 쉽지 않았지. 그래도 내가 선택한 일이라서 그런지 즐거웠네. 인생 말년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브라질 시인인 마샤 메데이로스는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삶의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맞는 말일세. 아직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 헛소리 그만 하게나. 더 늦기 전에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갖길 바라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을 쉬는 행위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데이로스의 당부도 잊지 말고.  

마지막으로, 정현종 시인의 <벌써 삼월이고>를 크게 읽어보세. “벌써 삼월이고/ 벌써 구월이다.// 슬퍼하지 말 것.// 책 한 장이 넘어가고/ 술 한 잔이 넘어갔다.// 목메이지 말 것.// 노래하고 노래할 것.”

가는 세월 슬퍼하지 말게나. 시간이 멈추면 우주가 끝나는 것이네. 죽음이지. 시간은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야 하네. 그래야 생명이 이어지지. 이 우주에 흐르지 않고 멈춰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사랑도 슬픔도 생명도 역사도 다 흐르는 거야.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웃어 봐. 노래도 부르고. 흐르는 시간의 리듬에 맞춰 춤도 추자고. 그러면서 틈틈이 사랑도 나누고. 뜨거운 마음으로 앞만 보고 나아가세.


해당 박스는 '광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