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9 21:05 (금)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염치 실종된 5·18 망언
[김재필 ‘에세이’] H에게- 염치 실종된 5·18 망언
  • 시사위크
  • 승인 2019.02.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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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살다 보면,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네. 그냥 혼자 골방에 들어앉아 멍때리거나 신문과 방송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어. 백석처럼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고 호기부리며 떠나고 싶은데… 그렇지 못 하니, 나이 들어서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는구먼. 
 
지난 8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주최한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나온 막말들이 가관일세.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이 광주에 침투했다”“전두환은 영웅이다” “폭동이 민주화 운동이 됐다”“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이 세금을 축낸다”등의 막말이 쏟아졌네. 자신들이 속한 정당이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부에서 ‘5·18 특별법’으로 이미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광주민중항쟁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저런 망언들을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에서 하다니… 다시 전두환 씨가 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아닌지 착각할 정도일세.   
 
송경동 시인이 <혁명>이란 시에서 “자꾸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한탄한 적이 있네.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시인처럼 우리도 조용히 눈을 감고 함께 생각해 보세.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압축 근대(compressed modernity)를 하면서  잃어버렸거나 생략해버린 것들이 무언인가를.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廉恥)도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일세. 맹자가 말하는 ‘수오지심’의 다른 이름이 염치야.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염치’를 모르고 살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아. 특히 공부 잘 해서 관료나 정치인, 교수 등으로 이른바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부자 부모 만나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기업인들 중에 부끄러움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맹자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태어나고, 학문과 교육을 통해서 그런 도덕적 가능성을 계발할 수가 있다고 말했네. 학문을 통해 인성을 계발하고 수양하면 누구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진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서양의 계몽주의자들도 인간은 누구나 교육을 통해 미성숙 상태로부터 벗어나 오성을 사용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근대인이 될 수 있다고 했어.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도 높고 대학진학률도 높은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춘 군자보다는 몰상식하고 염치도 모르는 소인배들이 민의의 전당에서 아직도 추태를 부릴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누차 강조하지만,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게 우리 사회의 가장 고약한 문제들 중 하나야. 많이 배운 사람들이 부추기는 욕망들이 대중들의 인성마저도 망치고 있어. 그래서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이 사회가 혁명 같은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 제대로 지속될 수 있을지 걱정이야. 말도 안 되는 막말로 자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국회의원들만 사라진다고 세상이 맑아지는 것은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독일처럼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 특정 집단을 공개적으로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등을 처벌하는 법 제정도 고민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게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야. 지금 같은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에서는 자본과 학력이 높고 출세한 사람들이 두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지금 우리 정치는 귀족정치나 다름없지. 하지만 다당제가 되면 달라질 수밖에 없어. 사회경제적 불평등, 노동, 환경과 생태, 다문화가정, 여성, 농민, 청년, 노인 등 다양한 이슈들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하게 되면 유럽처럼 의원들의 구성도 다양해져. 지금처럼 변호사, 교수, 의사, 고급장교, 약사 출신만 국회의원 하는 게 아니지. 상식을 중시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가야 정치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가 맑아진다는 게 내 소신일세.

지금까지 살면서 요즘처럼 지구에 살고 있는 동물들 중 가장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 적이 없었네. 구상 시인의 <가장 사나운 짐승>일세. 지금과 같은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의 한 사람인 나부터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사나운 짐승’이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겠네.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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