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산하기관 감사건과 관련해, '블랙리스트'라는 언론의 표현에 대해 청와대가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뉴시스
환경부 산하기관 감사건과 관련해, '블랙리스트'라는 언론의 표현에 대해 청와대가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특정 현상을 어떤 단어로 처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담론이 결정된다고 봤다. 예를 들어 ‘코끼리냐 아니냐’를 두고 한참을 싸워봤자 마지막에 뇌리에 남는 것은 ‘코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더욱 코끼리를 떠올린다. 프레임의 힘이다. 결국 승패는 누가 프레임을 주도하느냐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최근 수세에 몰려있다. 김경수 경기도지사가 업무방해 혐의로 법정 구속됐고, 김태우 전 특감반원의 감찰내용 폭로로 시작된 검찰의 수사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직권남용 여부로 확대됐다.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민간인 사찰’ ‘블랙리스트’라는 잣대가 세워졌고, 논점은 ‘민간인 사찰이냐 아니냐’ ‘블랙리스트냐 아니냐’로 형성됐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초기대응은 적극적이었다. 김태우 전 특감반원이 폭로한 ‘감찰내용’을 건건이 해명했고,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이 특감반원의 활동과 감찰, 보고체계까지 자세히 밝힐 정도였다. 현직 민정수석이 이례적으로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과거 판례와 대조하며 “민간인 사찰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논란은 더 커졌고, 김의겸 대변인은 “사찰 DNA가 없다”고 했다. 이것이 오히려 ‘선민의식에 빠져 있다’는 역풍을 맞았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프레임 안에서의 전쟁은 쉽지 않았다.

◇ ‘블랙리스트 VS 이중잣대’

2차전은 환경부 산하기관 인사 문제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검찰은 특정 인사를 찍어내기 위한 표적감사가 있었는지 여부와 이에 대한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는지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환경부 차관실과 감사관실 등을 압수수색한 결과, ‘한국환경공단 임원의 사퇴 여부’를 기록한 문건을 발견했다. “청와대 인사수석실의 지시를 받았다”는 내용의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보수언론은 ‘문재인 정부판 환경부 블랙리스트’라고 사건을 규정했다.

청와대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블랙리스트’하면 떠오르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다. 민간인이 아닌 공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감찰이며, 만 명 단위에 달했던 문화예술계 리스트와 비교하면 24명은 숫자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게 근거다. 또한 공공기관장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기에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환경부와 협의하는 것은 합법적인 업무라는 점도 강조했다.

나아가 청와대는 특정 언론사들을 콕 찍어 ‘이중잣대’라는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보수정부에서는 ‘전정권 공공기관 인사들의 자진사임’을 촉구했던 언론들이 이제와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다. ‘[사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 조선일보 08.03.06’ ‘[사설] 노 정권 낙하산 인사 스스로 물러나야, 문화일보 08.03.13’ ‘[사설] 색깔들은 버티고, 엉뚱한 사람만 나가니, 중앙일보 08.03.19’ 등이 청와대가 꼽은 내용들이다. 또한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의 인터뷰 내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언론은 블랙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신중을 기해 주기 바란다”면서 “일부 언론 보도가 더욱 씁쓸한 것은 과거의 보도 태도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구태여 문구를 인용할 필요까지도 없다. 눈에 띄는 몇몇 사설과 칼럼의 제목만 올려보겠다”며 보수언론을 정조준 했다. 언론의 ‘이중잣대’를 지적함으로써 싸움의 프레임을 바꿔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과는 알 수 없다. 법적으로 최종 사건이 마무리된 뒤 국민의 뇌리에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가 남을지, 아니면 ‘보수언론의 이중잣대’가 남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청와대는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도 한 차례 보수언론과 맞붙는 등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김 대변인은 조선일보의 2014년 ‘통일은 미래다’라는 대형 기획기사를 언급하며 “당시에 말한 미래와 지금 우리 앞의 미래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며 ‘발목을 잡지 말라’고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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