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가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 공장 노동자 14명에 대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반올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가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 공장 노동자 14명에 대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반올림

[시사위크=조나리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이 집단 산재신청을 했다. 삼성 직업병 문제가 불거진 지 11년 만인 지난해 11월, 삼성전자는 피해 보상 중재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방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아울러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고용노동부 등이 직업병 피해자들의 입증책임을 완화한 현행 대법원 판례와 달리 과거의 산재 판단 기준을 여전히 적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삼성 노동자 14명, 14번째 집단산재 신청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는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도체 공장 노동자 14명에 대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2007년 고(故) 황유미 씨 사연이 알려 진 후 2008년부터 시작된 반올림의 집단 산재신청은 이번이 14번째다.

이번 집단산재 신청자들이 일했던 곳은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세메스(삼성전자 사내협력) ▲두영(삼성디스플레이 사내협력) ▲IMS(삼성전자 사내협력) 등이다. 또한 이들이 취급했던 생산품은 ▲반도체 ▲LCD ▲휴대폰 ▲반도체 제철 ▲가스감지기 등이다. 14명 중 2명은 지난해 2월과 10월 사망했고, 대부분 항암치료 중에 있다.

제14차 반올림 집단산재 신청 노동자 및 유가족들 현황. /반올림
제14차 반올림 집단산재 신청 노동자 및 유가족들 현황. /반올림

사망자 중 한 사람인 임한결 씨는 2015년부터 2년6개월간 삼성전자 사내 협력사에서 가스감지기 설치 업무를 수행했다. 이후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얻은 임씨는 지난해 10월 만 29세 나이로 가족 곁을 떠났다. 임씨는 평소 클린룸에 출입하며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돼 있었다.

임씨의 어머니 유정옥 씨는 기자회견에서 “아들은 우리 부부에게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다”면서 “운동을 좋아해 주말에는 축구를 즐겼고, 어느 날 아들이 공을 차고 집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열이 나 병원에 갔더니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희 부부는 아들에게 골수를 이식해줬고, 경과가 좋아 곧 완치되리라 믿었지만 병은 또 재발했고 결국 진단 1년 만에 숨을 거뒀다”면서 “너무나 건강했던 아들에게 병이 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후 반도체 산업과 희귀병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우리 아들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 반올림 “어떤 유해물질 사용하는지 아무도 몰라”

반올림은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와 관련해 이제 다 해결된 문제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이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을 겨우 확인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삼성 및 전자산업 기업들이 자사 공정에서 어떤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고용노동부의 산재 판정이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법원은 2년 전부터 전자산업과 같은 첨단산업에서 업무와 직업병 사이에 명백한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더라도 둘 사이 연관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예컨대 화학물질 노출이 기준치 이하라고 하더라도 복합노출에 따른 상승작용을 고려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또한 높은 발병률, 정부의 조사 미흡, 사업주의 조사 거부와 같은 사정들은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반올림은 “대법원과 달리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고용노동부는 산재 판단에 있어 지금까지도 높은 노출수준, 협소한 의학적 발병원인, 엄격한 입증 등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이는 곧 과학을 핑계로 직업병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로 인정하지 않은 사건들 가운데 법원에서는 산재로 인정된 비율이 75%에 이른다.(24건 소 제기 중 18건 산재인정) 더욱이 고용노동부 재심사위원회는 현재까지 단 1건도 산재를 인정한 바 없다.

반올림은 “잘못된 과거의 판단 기준을 고집하는 것은 신속한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산재보험법 취지에 맞지도 않고, 기관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허무는 것”이라며 “부디 이번 집단 산재신청에 대해서는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철회하고 대법원 판례에 따라 신속하게, 산재를 인정하길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1월 29일에는 삼성SDI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황모(32)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황씨는 생산직이 아닌 연구직으로 근무했던 만큼 더욱 관심이 모아졌다. 반올림에 따르면 황씨의 작업 공간은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의 발암물질에 노출돼있었다. 또한 사전 안전교육은 아무런 보호 장치도 제공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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