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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의 향상일로] ‘화령(話靈)’ 문화
[박영재의 향상일로] ‘화령(話靈)’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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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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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오늘날 우리는 삼독(三毒),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되어 갑을(甲乙) 모두 이해득실에 얽힌 지저분한 내막은 뒤에 감추고 모두를 위함이란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앞세우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간에 소통은 점점 더 단절되어 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처에서 무차별적으로 문자(文字)를 포함해 언어(言語) 폭력을 휘두르며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 같습니다. 참고로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일 수록 이런 과정을 통해 진실이 언론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경우 크게 패가망신하기도 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모든 것에 신(神)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 일본인들의 ‘언령(言靈)’ 문화, 즉 ‘언어에 신령(神靈)스런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려 할 때마다 신중하게 언어문자를 선별해 사용하는 태도를 참고하며 새롭게 ‘화령(話靈)’ 문화를 제창하고자 합니다.

◇ ‘언령’ 문화

먼저 일본의 ‘언령’ 문화를 간결하게 잘 드러낸 위키백과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리를 내어 말한 언어가 실제 현실에 무언가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고, 불길한 말을 하면 흉사가 일어난다고 여긴다. 일본은 언령의 힘에 의해 복이 찾아오는 나라라고 하여 ‘언령으로 행복해지고 번영하는 나라’로 불렸다.”

이번에는 필자가 직접 목격한 ‘언령’ 문화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겠습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라면전문점인 ‘일란(一蘭)’을 방문해 보니 벽에 ‘言靈’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한글로도 번역된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종업원 일동은 ‘행복을’이라는 구호로 고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언어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언령)’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장 내에 희망과 행복이 넘치도록, 고객님의 ‘행복’을 기원하며 ‘언령’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한편 비록 ‘언령’이란 용어를 쓰지는 않았으나 우리 문화 풍토 속에서도 같은 전통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든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라는 속담들이 있듯이 우리가 만일 ‘언령’ 문화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한다면, 보다 순화된 언어들을 골라 쓰게 될 것이며, 이럴 경우 점차 언어폭력의 늪에서 빠져나오며 각계각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통 부재의 문제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라 확신합니다.

◇ ‘작명’ 문화

이번에는 ‘언령’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작명(作名)’ 문화에 대해 살피고자 합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대체로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은 집안 어른께 부탁드려 ‘이름’을 짓는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이름을 받은 아이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자기 이름의 참뜻을 새기며 이에 걸맞는 인재로 성장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사람들은 ‘과연 그 사람 이름값을 하는구나!’하고 칭송하기도 하니 이름에 정말 영험한 힘이 깃들여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작명 과정이 좀 색다르기에 소개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로 누님이 세 분인데 아버님께서 모두 이름 가운데 자를 꽃부리 ‘영(英)’으로 지으셨습니다. 그후 ‘2대독자’인 필자가 태어나자 할아버지께서 ‘병(炳)’자 항렬에 매우 읽기 어려운 넓을 ‘호(灝)’를 붙여 아버님의 이름을 지으시는 바람에 너무 고생하셨다며, 집안의 항렬 전통을 무시하고 아버님께서 손수 옥편을 뒤져 가장 읽기 쉬운 자로 재주 ‘재(才)’를 골라 ‘영재英才’라고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중학교에 진학하자 한문 선생님께서 스승의 보람 가운데 하나가 ‘득천하영재(得天下英才)’라는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름과 달리 자네는 둔재(鈍才)로군!’ 하시며 놀리셨지만, 돌이켜 보니 필자가 성장기에 이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좀 더 분발하다보니 그나마 ‘오늘의 나’가 있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 ‘법명’ 문화

이번에는 종교를 초월한 참선수행단체인 선도회의 ‘법명(法名)’ 문화를 살펴보겠습니다. 회원이 입문 수행과정을 마치면 ‘인생지도’를 제출하게 되는데, 지도하시는 법사(法師)께서 이를 바탕으로 회원의 개성을 두루 살펴 이에 걸맞는 ‘법명’을 지어주게 됩니다. 보기를 들면 필자의 경우 스승이신 종달(宗達) 선사께서 ‘진리[法]을 드러내다.’라는 뜻의 ‘법경(法境)’이란 법명을 지어주셨습니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법명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는 평생의 화두가 되어 필자의 수행을 채찍질해 오고 있습니다.

한편 종교를 초월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이면서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한 예수회 소속 서명원 신부님에 대한 보기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필자가 1994년 3월부터 천주교인 교수님들 몇 분의 요청으로 서강대 성당 기도실을 빌려 신촌지부 참선모임을 주관하기 시작했는데, 1996년 9월부터 서명원 신부께서 모임에 합류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2시간씩 좌선 수행을 치열하게 이어가다 2년 후 입문과정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선도회 전통에 따라 앞으로 ‘천주교(天主敎)의 달도인(達道人)’이 되시라는 뜻으로 ‘천달(天達)’이란 법명을 지어드렸습니다. 그후 과연 기대에 부응하시며 마침내 2007년 선도회 신촌제3지부와 국제지부를 주관하는 법사가 되셨습니다. 또한 2016년에는 경기도 여주에 천주교 평신도들을 주축으로 (사)도전돌밭공동체를 설립하셨으며, 정년퇴직한 2019년 3월부터는 온몸을 던져 이곳에서 종교를 초월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새로운 수행 풍토 조성에 전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고로 필자 아내의 영세명은 천주교에서 영성(靈性)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는 아빌라의 ‘데레사’인데, 성인(聖人)의 이름을 쓰는 영세명 역시 같은 효과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필자도 가끔 이 영세명을 떠올릴 때마다 깊이 되새겨보는, 데레사 성인께서 저서 <완덕의 길>을 통해 후배 수녀님들을 위해, 아니 사실은 온 인류를 위해 말씀하신 금언(金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디 수도회의 회헌(會憲)과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십시오. 만일 각자 일상의 삶 속에서 할 일을 어김없이 잘 한다면 성녀(聖女)가 되는데 따로 (하느님의) 기적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 ‘화령’ 문화

한편 동양 종교 전통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묻고 답하기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지혜로운 이야기[話]들이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필자는 앞으로 이런 전통을 ‘이야기에 영적(靈的) 가르침이 담겨 있다.’라는 뜻의 ‘화령(話靈)’ 문화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불교 전통 속에서 두 가지 사례를 골라 기술하고자 합니다.

사례 1. 독화살 이야기 : 사실 필자는 2대독자로 태어나 어머니께서 끔찍하게 아들을 위하셔서 형편없는 마마보이로 자랐습니다. 그러다 뚜렷한 삶의 목표도 없이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 화근이 되어, 1학년 2학기를 맞이하면서 1년간 몹시 방황했었습니다. 다행히 독서가 취미였기 때문에 이 무렵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폭독(暴讀)을 하다가 접한 결정적인 사건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현 위치를 일깨워준 ‘독화살의 비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세존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말룽캬라는 제자가 ‘세계는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 등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깨우쳐주셨습니다. 독화살을 맞아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 만일 독화살을 뽑고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고 누가 왜 나를 쏘았는가? 하고 고민하다 보면 독은 온몸에 퍼져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독을 먼저 치료하고 튼튼한 몸이 되었다면 얼마든지 진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필자는 이 비유를 한 학기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꼭 이야기해 주며, 살아가는 순간순간 ‘과연 이 순간에 나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가르치며, 또한 이런 가운데에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다고 일깨워주곤 합니다. 사실 종교를 초월해 일상 속에서 자기성찰 수행을 이어가다 보면 이러한 태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길러져 가장 시급한 일들을 신속 정확하게 대처해 가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아 가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느 날 문득 세월을 부리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례 2. ‘무’자 화두 이야기 : 필자는 방황을 마친 직후인 1975년 10월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해 독화살의 비유처럼 일상 속에서 가장 시급한 일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간화선 수행을 치열하게 이어가다가, 드디어 1987년 9월 선종(禪宗)의 정석(定石)인 <무문관(無門關)>을 포함해 선도회의 모든 점검과정을 마치며 ‘삶과 수행이 둘이 아님[生修不二]’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문관>에 보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수행자들이 목숨을 걸고 씨름하는, ‘무(無)’자(字) 화두(話頭)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어느 때 한 승려가 조주 선사께 여쭈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러자 조주 선사께서 ‘무(無)!’라고 대답하셨다.”

이 화두의 핵심은 경전(經典)에서는 석가세존께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조주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다[有]’, ‘없다[無]’라고 할 때의 상대적인 ‘무’라는데 걸리면 이 화두는 평생 해결 못하는 난제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유·무를 초월할 것인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체득할 일입니다.

참고로 세존께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개라고 할지라도 불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주 선사께서는 어떤 승려의 질문에는 “무(無)!”라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은 다른 승려가 똑같이 물었는데 이때는 “유(有)!”라고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주 선사의 ‘유’와 ‘무’는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뜻의 ‘유’나 ‘무’가 아닌 것이며, 팔만대장경을 다 뒤져보아도 이에 대한 견해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오직 스스로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체득해야만 조주 선사의 배짱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일생 동안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당하셨던 종달 선사께서는 1984년에 펴낸 자서전 <인생의 계단>에서 ‘무’자 화두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셨습니다. “간신히 조주 선사의 ‘무’자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불진(一生受用不盡)] 그런데 이 대목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가 제자인 에커만에게 했던 ‘젊을 때 평생토록 다 쓸 수 없는 자산을 만들도록 하게’라는 조언과도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비단 불교 경전이나 그리스도교 성경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 가운데 어느 이야기를 통해서든, 회심(回心)하면서 통찰(洞察)과 나눔[布施]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실천적 삶을 이어갈 경우, 그 이야기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凡人]’들을 ‘부처[佛]나 성인(聖人)’으로 탈바꿈시켜 삼독의 중독에서 철저히 벗어나게 하는, ‘화령(話靈)’ 문화를 꽃피우게 하는 원천이겠지요.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전공분야: 입자이론물리학)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물리학과장, 교무처장, 자연과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한편 1975년 10월 임제종 양기파의 법맥을 이은 선도회 초대 지도법사이셨던 종달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스승이 제시한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2009년 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로 새롭게 발족)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한편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께 두 차례 입실 점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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