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당시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 씨를 13대 대선 전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이 외교부 비밀 문서로 확인됐다. / 뉴시스
전두환 정권 당시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하자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 씨를 13대 대선 전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이 외교부 비밀 문서로 확인됐다. / 뉴시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32년 만이다.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외교 문서 비밀이 해제됐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사건 처리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공개된 문서들의 내용을 종합하면, 전두환 정권은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북풍’이다.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남북한 긴장관계를 형성했다는 얘기다.

◇ 대선 전날, 김현희가 몰고 온 북풍 프레임

일례가 사건 당시 외교부 차관보였던 박수길 전 유엔대사의 보고 문건이다. 그는 폭파범 김현희(하치야 마유미) 씨가 붙잡혀 있는 바레인에 특사 자격으로 급파됐다. 여기서 “바레인 당국 실무자선에서는 KAL기의 잔해도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가 성급하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며 “마유미가 늦더라도 (1987년 12월)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12일까지 인도통고를 주재국(바레인)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즉, 전두환 정권은 김씨의 송환 시점을 처음부터 못 박고 있었다. 바레인 측에선 이를 망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측으로부터 김씨가 사건에 연루됐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출해주길 바랬고, 급기야 김씨의 이송(12월 13일)을 5시간 앞두고 돌연 연기를 통보하기도 했다. 이에 박수길 전 대사는 “우리도 국내 사정으로 마유미를 언제나 인수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며 바레인 측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희 씨의 국내 송환은 전두환 정권에서 북풍을 대선에 활용,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을 위한 정략적 차원으로 풀이되고 있다. / YTN 방송화면 캡처
김현희 씨의 국내 송환은 전두환 정권에서 북풍을 대선에 활용, 후계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을 위한 정략적 차원으로 풀이되고 있다. / YTN 방송화면 캡처

결국 김씨는 전두환 정권의 계획대로 12월 15일 한국에 도착했다. 13대 대선일(16일) 하루 전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사건을 북한 공작원에 의한 폭탄 테러사건이라고 발표했다. 7년8개월 동안 밀봉교육을 받은 북한 외교관의 딸 김씨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이다. 다음날 노태우 후보가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군사정권의 연장이었다. 정황상 전두환 정권의 사건 조작설이 제기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건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참여정부에서도 재조사가 진행됐으나 전두환 정권에서 발표한대로 북한 소행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김씨 역시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다. 도리어 지난해 1월 CNN 인터뷰를 통해 “다가오는 88서울올림픽을 막는 것이 임무였다”며 범행 동기를 밝혔다. 문제의 문서를 작성한 박수길 전 대사는 김씨의 송환을 서두른데 대해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다만 전두환 정권이 사건의 진실 규명보다 정부의 이미지 관리에 몰두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건 발생 나흘 뒤인 12월 3일, 사고 조사단장이 수색 종결 가능성을 보고하자 전두환 정권은 “조사반이 기체 수색에 결정적인 전기가 있기 전에 귀국 한다면 마치 정부가 기체 수색 노력을 포기한 것처럼 보여질 우려가 있다”고 타전했다. 뿐만 아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동향을 보고하는가 하면 ‘정부의 노력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우선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KAL기 폭파사건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사건의 주범 김씨도 살았다. 그는 1990년 한국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게 노태우 정부의 설명이었다. KAL기 가족회와 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는 김씨의 진술 외에 정부의 수사 발표를 뒷받침할 물증이 없다는 점에서 주범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데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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