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스페셜뉴스
[한국인 노리는 마약②] 북한산 필로폰 유통 ‘비상’
2019. 05. 30 by 소미연 기자 pink2542@sisaweek.com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다. 당시 신종마약인 GHB(gamma-Hydroxybutyric acid)가 서울 대학가와 유흥가 주변에서 암암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취재 내용을 보도했다. 최근 버닝썬 사건으로 알려진 ‘물뽕’의 정식 명칭이 바로 GHB다. 다시 말해, 이미 오래 전부터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 사건에 물뽕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근래 국내 유입이 급증한 것으로 알려진 야바(YABA)와 액상대마도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신종마약의 확산 속도에 정부의 대응책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마약청정국 시절은 끝났다. | 편집자주

북한은 외화벌이 차원으로 정권 차원에서 마약 밀매 사업을 적극 장려해왔다. 남북 관계 개선 과정에서 염두에 둘 부분이다. / 노동신문
북한은 외화벌이 차원으로 정권 차원에서 마약 밀매 사업을 적극 장려해왔다. 남북 관계 개선 과정에서 염두에 둘 부분이다. / 북한 노동신문, 뉴시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북한에선 필로폰을 ‘빙두’라고 부른다. 빙두는 ‘얼음’의 중국식 발음이다. 흰색 결정체의 필로폰이 얼음과 같다는 의미다. 결정체의 순도가 높을수록 최상급으로 분류된다는 점에서, 빙두(얼음)로 불리는 북한산 필로폰의 지위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서도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북한산 필로폰을 찾는 마약사범들이 증가했다는데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다.

윤흥희 한성대 마약알코올학과 외래교수는 “필로폰을 세계적으로 잘 만드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라면서 “북한산 필로폰의 국내 유입을 막을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농수산물을 거래하는 북한 주민들이 필로폰 소량을 중국으로 가져와 본인이 사용하거나 교포들에게 판매했다. 하지만 국경의 왕래가 빈번해지고 탈북자가 증가하면서 유통량이 늘었다. 이들에게 필로폰 판매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 북한 학생들의 마약 중독 실태 심각

2015년 10월 1일자 북한 관영매체 노동신문에 실린 사진. 김정은 위원장이 현지지도에 나섰던 정성제약종합공장은 필로폰을 생산·유통하는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알려졌다. / 뉴시스
2015년 10월 1일자 북한 관영매체 노동신문에 실린 사진. 김정은 위원장이 현지지도에 나섰던 정성제약종합공장은 필로폰을 생산·유통하는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알려졌다. / 뉴시스

실제 한국 입국에 성공한 탈북자 중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필로폰을 판매하다 적발된 사례가 있다. 2010년 1월 경찰에 붙잡힌 30대 탈북자 부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당시 북한산 필로폰을 아기 기저귀에 몰래 숨겨 들여온 부부는 경찰 조사에서 “직업을 찾지 못했다. 자식들까지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외 북한에 두고 온 가족 걱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약에 손대는 탈북자들도 적지 않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남북 평화 국면에서 향후 남북의 왕래가 자유로워질 경우 북한산 필로폰의 공급과 수요도 자연히 증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대한 선제적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내 입국한 북한 국적자, 북한 출신들을 대상으로 한 마약 범죄 근절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마약의 불법성에 대한 인식이 낮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북한의 마약 실태를 파악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은 국가 차원에서 마약 밀매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아편 제조를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말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농사가 안 되는 고산지대에 양귀비를 재배해 외화를 획득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난과 식량 위기에서 마약 밀매가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악용된 것이다.

북한의 마약 밀매가 최초로 적발된 사례는 1976년 5월, 북한 외교관 2명이 이집트 카이로 세관에서 외교행랑을 통해 해시시 400kg을 밀수입하다 적발된 사건이다. 당시 북한은 장성택이 주관하는 대성무역총회사의 통제 아래 라오스와 레바논 등지에서 아편 및 헤로인을 구입한 후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이용해 다른 나라로 재판매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장성택은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이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고모부다.

북한산 마약은 제약회사에서 약학 대학 졸업생들이 전문적으로 만들어 순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마약 시장에서 최고급으로 불린다. / TV조선 탐사보도 세븐 방송화면
북한산 마약은 제약공장에서 약학 대학 졸업생들이 전문적으로 만들어 순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마약 시장에서 최고급으로 불린다. / TV조선 탐사보도 세븐 방송화면

‘간접수입’에서 ‘직접재배’로 판매 패턴이 바뀐 것은 1980년대 후반으로 보인다. 북한은 1988년 7월 이래 양귀비 재배지를 대폭 조성했다.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북한 주민들의 마약 오남용이 심각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윤흥희 교수는 “양귀비 진액(아편)을 채취할 때 학생들까지 동원되는데,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학생들이 진액을 몰래 먹기 시작하면서 중독자가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의료품 보다 마약 구하는 게 더 쉬워”

문제의 필로폰은 1990년대 말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부터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평양, 흥남, 라남(나남) 지역의 제약공장이 필로폰의 생산·제조 공장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다. 약학 대학 졸업생이 전문적으로 만들고 있는 만큼 순도가 높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로 보도되고 있다. 언론 인터뷰에 나선 탈북자 출신의 마약사범들은 “북한 사회에 마약이 대중화됐다”고 말했다.

실제 취재 중에 만났던 한 탈북자도 “북한에선 의료품 보다 마약을 구하는 게 더 쉽다”고 귀띔했다. 지난 2016년 12월 북한인권정보센터 측은 탈북자 1,467명을 대상으로 북한 내 마약 접촉 경험을 분석한 결과 △2013년 26.8% △2014년 25.0% △2015년 36.7%를 기록하며 빠른 증가 추세를 보였다고 밝혔다. 최근 탈북자일수록 마약 접촉 경험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낸 조성권 정치학 박사는 ‘북한 마약밀매의 실태와 대응방안’ 논문을 통해 “통일 후 과도기의 정치·경제적 혼란기에 마약 밀매의 현상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 조직범죄가 급성장했듯이 북한도 제2의 러시아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논문은 1998년 8월에 발표됐다. 지난 20년 동안 북한 마약 밀매 우려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