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7 11:34 (수)
[김재필 '에세이'] H에게-현대사회에서 ‘경쟁과 몸값’
[김재필 '에세이'] H에게-현대사회에서 ‘경쟁과 몸값’
  • 시사위크
  • 승인 2019.06.1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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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친구야, 영어 문장으로 시작해서 미안하지만, “Root, hog, or die.”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자연에서처럼 사회에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19세기 말 사회진화론자들이 좋아했던 생명의 법칙이야. “재빨리 선수 치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살벌하지? 아니야?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삶의 법칙이니 새로울 게 없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들의 삶 자체가 ‘이빨과 발톱으로 붉게 물든’ 전쟁터로 바뀐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경쟁’을 새로운 신으로 모시는 전투적 사회가 된 게 사실이야. 1등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Winners take all(승자 싹쓸이)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자유주의 원리가 사회 각 부문에 침투함에 따라 승자독식사회가 되어버리고 말았거든.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는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도 반박할 수 없는 절대진리로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어 버렸고. 우리 조상들이 사람으로서 꼭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이미 죽은 가치가 되어 버렸어.

사람들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된 건, 협력보다는 경쟁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맹자가 말한 ‘본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어린 시절부터 학교나 언론 등 다양한 사회화기관을 통해 습득한 게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치들뿐이니 어린이고 어른이고 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의 상대로만 여기게 되었지. 상대가 누구든 경쟁에 몰두하다 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애정이 싹틀 여유가 없어. 측은지심 타령이나 하다가는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낙오자, 즉 잉여가 되기 쉽거든.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가 더욱 삭막하고 잔인한 전쟁터가 될 수밖에.

“-MENU-// 샤를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시인의 시 <프란츠 카프카>일세. 저 메뉴판에 있는 사람들 이름을 보게나. 대부분 20세기를 살았던 세계적인 유명 시인, 소설가, 철학자, 경제학자들일세. 그들 이름에 가격이 매겨진 메뉴판이라니. 문학이나 철학 등 정신적인 것들마저도 가격이 매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 현상을 풍자한 시일세. 그런데 카프카가 왜 제일 값싼 커피일까?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 잠자라는 주인공을 통해 일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삶을 그린 『변신』이라는 소설을 쓴 실존주의 문학 선구자의 이름이 붙은 커피가 가장 저렴하다니. 자본주의는 상품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배제하니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른바‘몸값’이라는 말이 일종의 욕으로 통했네.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곳 대학생들이 몸값을 올리기 위해 대학교에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어.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속물로만 보였거든. 하지만 이제 우리들도 그 속물이 되어버렸네. 많은 부모들이 비싼 사교육비를 쓰면서 자식들을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애쓰고, 많은 대학생들이 비싼 돈 들여가며 각종 자격증 취득과 스펙 쌓기에 몰두하는 것도 다 자기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경쟁 자체를 별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 자기 몸값을 올려 좋은 조건에 시장에 내 놓는 게 뭐가 문제냐는 거지. 지속적으로 보수 언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김제동 출연료’ 논란에서 보듯,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마저 누구든 능력만 있으면, 그 출연료가 세금에서 나오든 사기업의 상품 가격에 포함되어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든, 아무리 많은 돈을 받아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네. 더 심각한 것은 누구든 능력만 특출하면, 군복무 같은 국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도 면제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야. 그러면 능력 없는 잉여들만 군대에 가라는 것인지.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등이 광고나 출연료로 많은 돈을 받으면 그게 결국 자신의 임금, 일자리 등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아. 게다가 모두 경쟁에 몰두하다 보니 자신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근본적인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지. 경쟁에 매몰된 원자화된 개인들의 세상, 분명 자본의 승리일세. 그러니 헬조선도 감수할 수밖에. 슬픈 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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