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김정은의 모습이 화제다. 북한이 지난 23일 트럼프 친서를 읽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했는데, 편지의 중요 대목으로 추정되는 곳에 펜으로 줄을 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최근 고인이 된 어느 입시 명강사의 유행어인 “밑줄 쫙~”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공개되지 않은 친서의 내용이 무엇일까 관심이 쏠렸지만, 어떤 구절이기에 이처럼 강조해 놓은 것일까 하는 점도 궁금증을 낳았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정은이 친서 내용에 상당히 흡족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께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어 왔다”면서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읽어보시고 훌륭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하시면서 만족을 표시하셨다”고 밝혔다. 특히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한다”며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 생각해 볼 것”이라고 언급한 사실을 소개했다.

미국도 김정은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친서를 보낸 건 사실로 확인하고 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김정은으로부터 아름다운 친서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어 북한이 공개한 편지는 트럼프의 답신으로 보인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나 백악관 측도 친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 측에 “셈법을 바꾸라”며 불만을 표시하고 탄도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적 행보를 보여 온 북한이 트럼프의 친서에 반색하는 김정은의 모습을 공개한 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을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 등의 표현으로 치켜세우고 친서 내용을 ‘심중히 생각할 것’이라고 강조한 점은 적어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와 비핵화 협상을 이어나갈 의중임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과 미 행정부에 대한 김정은의 이 같은 모습은 그동안 북한 정권과 최고지도자가 보여 온 대미인식과 거리가 있다. 북한 당국이 반미와 반제국주의를 체제의 기본 이념틀로 여기고, 오랜 기간 주민들에게 이를 강요해왔다는 점에 비춰보면 거리감도 느껴진다. 북한은 120만 명에 이르는 군인은 물론 주민과 학생 등에게 ‘미제타도’를 강조해왔다. 군부대와 전투 장비에는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 미제 침략자를 소멸하자’라는 구호가 새겨져있고, 태어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미·반제 교양학습 시켰다.

물론 최고지도자와 핵심 계층, 노동당과 군부 고위급 간부들은 이와 다른 이중적인 행동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수령’으로 찬양되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등장한 운구차량도 그 중 하나다. 붉은 조선노동당 깃발에 덮인 고급 관(悺)을 싣고 있는 차량은 검은색 미제 링컨 컨티넨털 리무진이었다. 왜 생전에 그토록 반미를 강조하던 김일성과 김정일이 마지막 가는 길엔 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브랜드의 차량을 운구차로 썼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란 지적이 북한 전문가 그룹에서 나온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이런 모습은 이어졌다. 2015년 7월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을 ‘미제 살인귀’라 부르며 “적에 대한 환상은 곧 죽음”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관영 매체는 이 소식을 전하며 신천박물관을 “미제승냥이들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고발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미군이 6·25 전쟁 중 이 곳에서 주민 3만5,000여명을 학살했다면서 반미교육장으로 꾸며놓았지만 실제로는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발생한 참극 현장이란 게 역사적 사실로 규명됐다. 그런데도 미군에 의한 학살이 이뤄진 곳으로 날조해놓은 것이다. 주민들이야 그렇다 치고, 진실을 모를 리 없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대미비난 목소리를 높이는 건 반미를 통치와 체제결속에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0대 시절 스위스로 조기유학을 다녀온 김정은은 집무실 책상 위에 미국 애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컴퓨터를 두고 있다. 집권 첫 해인 2012년 7월 김정은이 부인 이설주와 함께 관람한 공연 무대에는 ‘미키마우스’와 ‘곰돌이 푸’를 형상화한 인형들이 대거 등장하기도 해 미국 언론에서까지 화제가 됐다. 미국 월트디즈니사의 작품으로, 북한 입장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상징물로 여겨질 법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일반 주민들이 이런 영화를 돌려봤다가는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김정은 위원장 생모인 고용희의 동생 고용숙이 남편과 함께 탈북 망명해 현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건 탈북자 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김정은으로서는 정말 감추고 싶은 대목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 과정에서 평양 로열패밀리 내부의 혈족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미국이나 서방 망명을 택했다는 점을 두고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김씨 일가야 말로 최대의 탈북 집단 아니냐”는 비야냥이 나온다는 전언도 있다.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한과 미국의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은 북·미 관계의 진전은 물론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과 오찬을 함께하며 70년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했고, 합의내용을 4개 항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노딜 이후 북·미 양측은 냉각기를 가졌고, 이제 회담 재개를 위한 물밑 움직임이 가시화 되는 분위기다. 2017년 말 트럼트 대통령과 김정은이 상대를 향해 ‘리틀 로켓맨’이라거나 ‘늙다리’ 같은 비난 발언을 서로에게 퍼부었고, 핵전쟁을 불사할 듯한 위협적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 진전이다.
 
이제 북·미 양측은 새로운 관계설정과 북한 비핵화 등 목표점을 향해 다시 여정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 됐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체제의 명운을 건 협상테이블을 앞두고 있는 형국이다. 그는 지난해 싱가포르 회담 직후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체제 생존이나 정권유지를 위한 꼼수가 아닌 진정성 있는 변화를 위해서라면 북핵 폐기 등 결단을 내리고 개혁·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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