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정계성 기자  학창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부평공단에서 조그마한 공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볼트와 너트, 나사 등을 제작해 납품하는 업체였다. 때때로 아버지를 돕던 친구는 어느 날부터인가 중국어를 가끔 쓰더니, 몽골어, 네팔어까지 조금씩 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공장은 2000년대 중반쯤 폐업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가격은 중국에 밀리고, 품질은 독일·일본에 치여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찾아보면 주위에 비슷한 사례는 꽤 된다. IMF로 무역규제의 빗장이 열리고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자유무역 기조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이 원인이다. 국가별 분업적 상품 공급 사슬에 따라 저렴한 원자재나 핵심부품이 해외에서 공급되니 대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값을 주고 국내 중소기업 제품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기업 중심 수출주도형 성장체제에서 중소기업들은 하나 둘 도산했고, 결국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빈부격차 심화로 이어졌다.  

대기업 중심 수출주도형 체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상위 5대 기업의 수출은 교역액 기준 전체의 28%였고, 전체 무역수지 규모 744억불 중 5대 기업이 올린 흑자가 547억불로 73.5%다. 특성별로 살펴보면 수입재화는 소비재·원자재·자본재가 비교적 골고루 분포된 반면, 수출재화는 ‘중화학공업품’이 85%로 압도적이다. 대기업 중심으로 분업적 상품 공급이라는 자유무역 기조에 합치하는 결과다.

그렇다고 대기업에 희생을 감수하라고 할 순 없다. ‘이윤의 극대화’가 지상목표인 기업들이 저렴한 해외 원자재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도 대기업들의 몫이다. 자유무역이 우리 경제성장의 ‘총량’을 늘리는 데 이점이 큰 만큼, 보호무역주의 회귀는 검토대상이 아니다. 결국 격차문제는 분배정책이나 복지로 풀어야하는데, 정치적 갈등이 극심해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일본 아베 총리는 핵심소재부품 수출규제라는 카드를 꺼냈다. 반도체 공정의 핵심부품을 상당부분 일본에 의존하던 삼성과 SK하이닉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다. 주요 대기업의 악재는 경제전반에 미칠 전망이다. 정부는 부랴부랴 ‘수입산 다변화’ ‘국산화’에 적극지원을 하겠다며 달랬지만, 기업들의 속내는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정치외교 패착의 피해를 왜 기업들이 봐야하느냐’는 게 골자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자유무역에 대한 불확실성이 이미 커졌다. 중국은 사드배치를 이유로 한국에 한 차례 비관세 장벽을 쳤었다. 역사 갈등이 첨예한 일본이라고 못할 게 없다. 어쩌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 품목은 시작일지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기화될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은 좋든 싫든 부품수급 다변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통이 따르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우리 경제구조의 변혁을 가져올 기회일 수 있다. 부품수급 다각화 과정에서 일부 제품의 국산화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했던 ‘재벌중심 경제구조 탈피’를 아베가 해낼 것이라는 농담 섞인 기대도 나온다. 물론 짧은 도발로 끝날 수 있다. 그러면 저렴하고 질 좋은 일본제품은 우리 대기업들을 다시 유혹할 것이다. 일본은 그런 방식으로 국내 소재부품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다. 성공을 위해서는 꾸준한 투자와 관심, 그리고 인내가 필요한 대목이다.

벌써부터 긍정적인 소식이 조금씩 들린다. LG그룹은 소재부품 국산화에 나섰고, 주식투자자들은 앞다퉈 불화수소 관련주를 물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을 대신해 불화수소의 공급을 제안했다고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변화의 시작임은 분명하다. 아베의 무역규제가 고마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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