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방송이나 신문 등 다양한 언론 매체나 여행 등을 통해 서구 복지국가 시민들이 살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네. 책에서만 보았던 복지국가에 관해 조금씩 알아 가면서 그런 나라 사람들의 안정된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 고무적인 현상이지.

하지만 그런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이 부족한 것 같네. 국가 권력과 자본이 원하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하면 ‘마음씨 좋은’ 정치인들의 노력과 ‘착한’ 부자들의 통 큰 기부 등을 통해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그런 나라가 될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아 보이네. 오늘날 서구의 복지국가들이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간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투쟁이 있었는지는 생각하지 못하지. 그러니 각종 선거에서 자본과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이 뜬금없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내걸어도 의심하지 않고 찍는 우를 범할 수밖에.

사민주의 복지국가인 북유럽이나 조합주의적인 복지 모델을 갖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가 지금처럼 윤택한 사회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노동조합이었네.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더 완벽한 복지국가체계를 구축하게 되었지. 반면 노동조합 가입률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은 최강국 미국은 ‘복지국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체제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미국이니까.

물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등 다른 요인들이 각 나라의 복지체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게. 복지국가의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는 다양한 요인들 중 노동조합의 힘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받아주게나. 물론 그런 노동조합의 정치적 힘은 노동조합 가입률에서 나오네. 북부 유럽 국가들의 노조가입률은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가 절정에 달한 지금도 60%가 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10% 정도일세. 이런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복지국가를 꿈꾸는 건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야.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것처럼 전혀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뜻일세.

남북분단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 사회의 반노동조합 정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나 괴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꽤 많아. 학교와 언론 등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들이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 국민들의 반노동조합 정서인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해.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어렵게 살아가는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앞으로 분명히 임금노동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래의 노동자인 대학생들도, 대부분 노동조합을 싫어하고 미워하네. 노동조합이 파업이라도 하면 마치 자기들이 자본가라도 되는 양 화를 내면서 노동자들을 욕 하지. 배부르니까 파업한다고. 빨갱이들이라고.

노동조합을 욕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강성 노동조합 때문에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네. 그래서 파업이 발생하면 조중동이나 경제지 등 보수언론에서는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터무니없이 많다는 점만 부각시키지. 여기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세.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이 지금보다 줄어들면 그걸 누가 가져갈까? 사기업인 현대자동차가 노동자에게 줄 임금을 줄여서 늘어난 이익을 국민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줄까? 외국인을 포함한 대주주들의 몫만 커질 뿐이네.

우리 사회의 반노동조합 정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부자들과 동일시하는 세태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네. 미국의 아메리칸드림 같은 이데올로기적 기제가 잘 작동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나도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도 있다’고 믿고 있지. 그래서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이 지배계급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회적 약자들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거야. 억울하면 출세하면 되지 왜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나쁜 놈 취급하는 거야?(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경제인을 묻는 여론 조사에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경영으로 유명하고, 각종 불법과 비리로 사법처리를 당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압도적으로 1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사회이동의 통로가 꽉 막혀버린 이 나라에서 예전처럼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을까? 어쩌다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게 몇이나 될까?

결국 약자들이 한 사회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방법은 상호연대밖에 없네. 단결해서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을 하나하나 고쳐나갈 수밖에 없어. 그래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노동 3권의 실질적인 보장인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보장해 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것 같네. 부끄러운 일이지.

대한민국 헌법 33조가 “근로자는 근로 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왜 우리 정부와 정치권, 특히 자유한국당은 구시대적인 논리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거나 반대할까? 급기야 유럽연합(EU)은 한국이 비준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전문가 패널’ 소집을 공식 요청했다고 하는군. 유럽 연합이 2011년 발효된 자유무역협정의 주요 조건인 핵심협약 비준 위반을 문제 삼아 제재 준비 절차에 들어갔다는 뜻이야. ILO 핵심협약과 19세기 수준에서 멈춰있는 우리 정치권의 노동관에 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계속 이야기하세.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