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 원

한국은행이 15일 7월 소비지출전망 CSI(소비자동향지수)에서 의류비 지수가 94로 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지수가 100 이상이면 소비자들이 옷을 더 사겠다는 뜻이고, 100 아래면 옷값을 줄이겠다는 뜻입니다. 의류비 지수 94는 2009년 상반기 이후 가장 낮은 거라고 합니다. 사람들 돈이 없어서 옷장사가 더 안 될 거라는 말이네. 이를 어떡하나. 사놓고 안 입는 것도 많은데….

1.며칠 전 서울 한복판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난닝구’ 바람으로 빨래를 했습니다. 점심 약속이 펑크 나는 바람에 무얼 먹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부근 지하철역 상가 김밥집이 줄 서서 기다릴 정도라는 말이 기억나 그리로 내려갔습니다.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든 백팩을 메고요.

젊은 직장인들 뒤에서 줄 서 있다가 자리 하나 맡아 라면에 김밥 한 줄, 공식대로 시켜 먹는데, 아뿔싸, 김밥 하나가 입에 들어오기 직전 젓가락에서 떨어져 라면 그릇으로 풍덩! 푸른색 재킷 아래 하얀 티셔츠가 엉망이 됐어요. 여름에 딱 맞는 패션이었는데 …. 오후에 다른 약속이 있는데 낭패였지요. 아니, 다른 약속이 없었다고 해도 어디든 돌아다니면 안 될 ‘꼬라지’였습니다. 아내 얼굴도 떠올랐어요. “제발 옷에 음식 국물 흘리지 마소!”라는 말을 같이 살면서 몇 번이나 들었던지.

물수건으로 문지르는 둥 난리를 치다가 지하철 역 화장실로 뛰어갔어요. 입은 채로 손에 물을 발라 문질렀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벗었지요. 훌러덩. 서울 지하철 좋아요. 누르면 물비누가 찍찍 나오잖아요. 수도꼭지 바로 옆에서. 비누칠까지 하며 막 비벼대니까 그때서야 뻘건 게 누렇게, 누런 것이 노랗게, 노란 것이 하얗게 변하더라고요. 국물 튄 곳이 여러 곳이라 돌아가면서 비벼대니까 결국 거의 빨래를 한 셈이 됐어요.

그 사이 화장실에 몇 사람이 들어왔다 나갔는데, 거울에 비친 그 분들 표정이, “서울 지하철 좋구나, 노숙자들이 난닝구 바람으로 빨래도 맘대로 할 수 있고. …” 이런 것 같았어요. 어쨌든 나는 그날 예정된 행사 다 잘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빨래해서 입은 이야기를 다 해줬답니다. 아내는 잘 했다고, 그때 안 빨았으면 옷 한 벌 버릴 뻔했다고 칭찬해줬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흰 옷을 다시는 안 입기로 작정했습니다. 국물 있는 음식 먹을 땐 꼴사나워도 앞치마를 먼저 청해 두르고 있습니다.

2.흰색 말고도 안 입는 색깔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빨강색입니다. 어느 날 큰형님을 만났는데, 칠순을 넘긴 분이 전보다 더 멋있어졌더라고요. 청바지, 흰 체크무늬 셔츠, 짙은 선글라스, 밀리터리룩 윗도리 등등 모든 게 세련되게 보였습니다. 머리까지 멋지게 헝클어져 있어서 베레모만 쓰면 게바라처럼도 보일 뻔한 모습입니다.

“형님, 멋있습니다!”고 했더니 “그러냐? 아우가 멋있다고 하니 좋네”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날 끌고 어디로 갑니다. 한 옷가게입니다. 형님은 당신이 지금 입은 옷 전부 여기서 샀다며, “네가 나보고 멋있다고 해서 한 벌 사주려는 거다”라고 합니다. 괜찮다고 해도 “내가 언제 너 옷 사줄 기회가 또 있겠냐. 좋은 말할 때 골라라”라고 해서 이것저것 만지는데, 내가 빨간 걸 집어든 모양입니다. 형님이 고개를 젓습니다. “젊게 보이려고 빨강 거는 입지 마라. 빨강 거 입는 거는 ‘나 나이 들었소’ 하는 거랑 똑같은 거다.”

충격 먹었습니다. 나이 덜 들어 보이려던 여러 노력들이 오히려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행동이라니! 그날 이후 한 벌 있는 빨강색 캐주얼 상의는 입지 않습니다. 바람막이라고 하기엔 두껍고, 잠바라고 하기엔 얇은 이 옷은 재벌 계열 패션 기업에서 나온 겁니다. 디자인도 색깔만큼 세련되고 독특하고 값도 좀 나간다는 뜻입니다. 왜 빨강색을 고르냐는 아내의 툴툴거림을 한쪽 귀로 흘리고 ‘지른’ 이 ‘고급진’ 옷은 베이지색 바지와 잘 어울렸고 짙은 감색 바지와도 괜찮았지만 2년째 그냥 걸려 있습니다.

3.작년에 유니클로에서 산 여름 남방도 안 입습니다. 색깔 때문도 아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을 미리 내다본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아요. 짙은 푸른색에 흰 체크무늬가 큼직하게 놓인 건데 감도 지지미 같은 거라 몸에 안 붙고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았지요. 그런데, 내 눈에 좋으면 남에게도 좋은가 봐요. 같은 걸 입고 댕기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아파트에도 있었고, 아내 따라간 교회에도 있었고, 버스에서도 몇 사람을 봤어요. 어떤 날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을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두 번 보기도 했습니다. 직장 입사 동기 모임에 갔더니 그걸 입고 온 친구도 있었어요. 여자 분이 입은 것도 봤어요. 그래서 유니클로 그 남방은 아웃, 유니클로도 아웃했습니다.

4.장마철, 옷장을 열었더니 눅눅해진 옷에서 냄새가 퀴퀴합니다. 안 입는 것들, 도대체 몇 벌이냐, 이제는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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