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0 18:45 (금)
[김재필 '에세이'] H에게- 높이 오르는 것 보다 깊이 들어가는 삶
[김재필 '에세이'] H에게- 높이 오르는 것 보다 깊이 들어가는 삶
  • 시사위크
  • 승인 2019.08.2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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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세상 돌아가는 게 하수상하고 답답해서 지난 며칠 동안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인이며 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의 <漁父辭(어부사)>를 읽고 또 읽었네. 예전 입시 공부하면서 읽을 때와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더군. 어부사는 삼려대부라는 고위직에 있었던 굴원이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과 싸우다가 패해 유배 갔던 상강(湘江)에서 만난 어부와의 대화를 시로 적은 거야.

초췌한 얼굴로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는 왜 벼슬에서 쫓겨났냐고 묻네. “세상이 모두 혼탁할 때 나 혼자 맑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했을 때 나만 홀로 깨어있었소. 그래서 쫓겨났소.”여기에서 유명한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오네. 세상이 다 썩었다는 뜻이지. 2012년 우리나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였어. 물론 지금 세상이 그때보다 더 맑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자 어부는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상 흐르는 데로 변할 줄 알아야지 왜 혼자만 고고한 척 행동하다가 쫓겨났냐고 다시 묻네. 굴원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는 말이 있다고 하면서, “어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에 뛰어들어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맑고 깨끗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라고 도도하게 대답하네.

그러자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지”라고 노래하면서 사라지네. 이른바 창랑가(滄浪歌)일세. 흔히 변절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용하는 시구이기도 하지.

지난 며칠 동안 내가 저 굴원의 <어부사>를 읽고 또 읽은 이유를 대충 짐작하겠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이 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가 참 좋다고나 말할까. 믿고 좋아하는 분이 개혁의 화신에서 이른바 ‘내로남불’의 화신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더군. 정치든 뭐든 까마귀들이 노는 곳에 기웃거리지 않고 소욕지족하기로 일찍 마음먹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야.

나희덕 시인은 <속리산에서>라는 시에서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네. 처음 저 구절을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순을 넘기면서 좀 이해가 되더군. 누구나 행복하려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뒤 따라 갈 필요는 없네. 세속적인 욕망을 쫓다 보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는 날이 꼭 오고 말지. 물론 사람에 따라 그 높이가 다르겠지만.

게다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면 다시 미끄러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야.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 그게 자연의 이치지. 그래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으면, 오르려고만 하지 말고 더 깊이 들어가려고 애써야 하네. 들어가는 것은 우주처럼 끝이 없어. 또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것과는 달리 깊이 들어가면 다시 나올 필요도 없네. 게다가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깊이 들어간 사람은, 진흙탕 연못에 핀 연꽃처럼,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어. 향원익청(香遠益淸)이지. 멀리 있어도 맑고 청아한 향기를 뿜어내며 고고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속리산(俗離山)은 이름 그대로 속세와 이별하는 산일세. 올 가을에는 <속리산에서>를 읊으며 속리산에 다시 오를 예정이네. 속세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에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높이에 대한 선망’과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세속의 습관’ 모두 꽁꽁 묶어 그곳에 묻어 버리고 올 걸세.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시인의 말대로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다가 스쳐가는 바람처럼 조용히 살다가 사라지고 싶네. 굴원처럼 멱라수에 몸을 던질 용기가 없으니 그냥 무심하게, 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게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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