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새벽에 깨서 두어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쪽을 돌아보고 일본 홋카이도를 거쳐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 타고 떠난 여행이 아니다. 인터넷으로 살펴본 여행이다. 모니터에 구글 지도를 띄워놓고 가보고 싶은 지역을 찾아보는 거다. 그곳의 역사와 문화는 따로 검색해서 읽어본다. 나는 이런 여행의 전문가다. 작년에는 ‘가보지 않은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책도 냈다.

이번 여행은 오스트리아 서쪽 끝 잘츠부르크를 출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가르는 돌로미테(Dolomite)산맥에서 잠깐 트레킹을 한 후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까지 약 450㎞를 훑어보는 것이다. 이 여정은 자유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오스트리아 출신 문필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알려줬다. 잘츠부르크에서 살았던 그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몇 달 뒤 이 여정을 따라 베로나를 다녀왔다.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 나온다. 그의 여정에 홋카이도를 추가한 것은 잠깐이라도 거길 들려야만 이번 여행의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나온다. 잠깐만 기다리시라.

잘츠부르크는 잘 알려진 곳이라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음악가 모차르트가 태어난 알프스산록의 아름다운 도시,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음악제로 관광객을 불러 모으며 뮤지컬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인 미라벨 정원과 호엔 잘츠부르크성,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볼 만하다는 정도만 소개하고 돌로미테로 떠난다.

돌로미테는 암석의 일종인 ‘백운석(白雲石)’의 이탈리아 말이다. 여러 달 전 영국 BBC 다큐멘터리에서 돌로미테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높이 3,000m 안팎인 하얀 봉우리들,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계곡 사이사이에 들어앉은 색색가지 아기자기한 마을과 짙푸른 초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봄, 여름, 가을엔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 겨울엔 스키를 타러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026년 동계올림픽은 여기서 열린다. 우리나라 여행자들에게도 소문나 블로그에 탐방기를 올린 사람이 많다. 며칠 전에는 공영방송 한 곳에서도 자체 제작한 트레킹 영상을 오랜 시간 보여줬다.

나의 돌로미테 탐방은 트레킹이나 스키가 목적이 아니다. 전투지역 탐방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적국이었던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돌로미테를 차지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다. 돌로미테를 차지하면,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빈까지 단걸음에 들어갈 수 있었고,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베니스까지 먹을 수 있었다.

수많은 희생자가 났다. 하지만 총이 아니라 돌로미테의 혹독한 날씨, 눈사태, 낙석, 지반붕괴, 암벽에 참호를 파고 길고 긴 터널을 뚫다 다치거나 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주전장은 높이 2254m인 크룬(Krn)산이었다. 저 아래 마을에서 까마득한 직벽 위로 분해한 대포 등 중무기와 식량 등 보급품을 날라야 하는 전쟁이었다. 쇠줄로 만든 사다리와 난간이 아직도 직벽에 달려있다.

내가 본 BBC 다큐멘터리는 돌로미테의 아름다움, 그 지역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비쳐주면서 전쟁 당시에 촬영한 흑백영상도 보여주었다. 알프스의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절벽 아래에서 대포의 포신과 바퀴, 기관총 등등을 메고 철사다리에 매달려 올라가는 얇은 옷차림의 병사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혹하고 무시무시한 영상이었다. 한 마을에 마련된 납골당에는 5,000명이 안치돼 있다. 몇 년 전에도 유해가 발견됐다.

돌로미테에서 내려와 베로나로 향했다.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하다 죽은 곳, ‘오페라의 도시’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다. 2000년 전에 지은 경기장 ‘아레나’에서는 매년 여름 이맘때 ‘베로나 오페라축제’가 열린다. 1947년,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마리아 칼라스가 이곳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마침내 ‘세기의 소프라노’가 됐다. 이곳 프로 축구팀에는 당돌해서 인기 높은 축구선수 이승우가 소속돼 2년을 뛰었다.

베로나에서의 내 목적도 관광은 아니다. 101년 전 이곳을 찾았던 츠바이크가 묵은 호텔에 가보는 것이다. 츠바이크는 호텔 이름을 적어놓지 않아 구글로는 검색이 안 된다. 그냥 그런 기분만 내본다. 무슨 기분이냐고?

츠바이크는 여행을 좋아했다. 전쟁이 끝나자 예전에 가봤던 아름다운 베로나가 생각나 길을 떠난다. 베로나의 호텔에 들어서서 숙박부를 적으려던 그는 국적 기입난이 있는 걸 보고 잠깐 망설인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인인 자신에게 적대감을 보일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돌로미테의 참혹한 전투 광경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적난에 오스트리아라고 적는다. 프런트 직원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오스트리아라는 글자를 내려다본다. 츠바이크는 괜한 짓을 했나, 프런트 직원이 소리쳐 다른 사람까지 불러와 적국 사람을 혼내는 게 아닐까 걱정 속에 빠진다. 정말 그가 소리친다. 다음은 츠바이크가 자서전에 써놓은 그대로다.

<프런트의 사나이는 놀란 얼굴로 “오스트리아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당장 나가라고 문을 가리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 정말 멋진 일입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이것이 처음 인사였고, 모든 증오와 선전과 선동은 다만 지식 계급의 열을 올리게 했을 뿐이고 근본에서는 유럽의 대중은 조금도 영향 받지 않았다는 것을, 전쟁 중에 이미 느낀 감정을 새롭게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모니터에서 베로나를 내리고 일본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 입국장 사진 한 장을 올렸다. 지난 19일 찍은 사진이다. 홋카이도 공무원들이 이곳을 찾은 한국인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다. 사진을 보면서 “아 정말 멋진 일입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베로나 호텔 지배인을 따라 한 번 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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