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편 연출작 영화 ‘82년생 김지영’로 관객과 만난 김도영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첫 장편 연출작 영화 ‘82년생 김지영’로 관객과 만난 김도영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지인의 추천으로 책 한권을 읽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우연히 접한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수록 찌릿했고, 의식에 균열이 생기는 느낌을 받았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첫 장편 연출작 ‘82년생 김지영’. 그렇게 김도영 감독은 운명처럼 김지영을 다시 만났다.

2018년 단편 영화 ‘자유연기’로 제17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은 김도영 감독이 장편 연출 데뷔작인 ‘82년생 김지영’으로 관객과 만났다.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 태어나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김지영(정유미 분)의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젠더 이슈로 화제를 모았던 조남주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젠더 이슈, 베스트셀러…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김도영 감독은 원작이 지닌 가치를 고스란히 지켜내면서도 영화적 재미까지 담아내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지영과 대현의 성장을 통해 오늘보다 더 나을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어 깊은 여운을 안긴다. 원작자인 조남주 작가는 “소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라고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 다음 날인 지난 24일 <시사위크>와 만난 김도영 감독은 쏟아지는 호평에 “기분이 이상하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82년생 김지영’이 많은 이들에게 닿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며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반응이 좋은데, 기분이 어떤가.
“이상하다. 첫 영화이기도 하고, 나한테 벌어진 일 같지도 않고, 낯선 감정을 느끼고 있다. 감격스럽기도 하다. 빨리 개봉해서 관객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하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좋기도 하고 긴장도 된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서사가 하나의 생명체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서사가 상업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둥그러지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떨리고 긴장되지만 동시에 이 서사가 많은 이들에게 닿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원작 소설을 봤을 때 어땠나.
“단편 영화 준비할 때 읽어보라고 추천받아서 읽었는데, 약간 찌릿하기도 하고 내 의식에 균열이 생기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안에 엉켜 있다가 유체이탈해서 내 삶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내 삶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의 삶, 친구의 삶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고, 그 문화 속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랬구나. 계속 바라보게 됐다.”

-당시에는 그 소설의 영화 연출을 맡게 될 줄 상상도 못했을 텐데,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감회가 새로웠겠다.
“이 이야기가 영화가 만들어지는지도 몰랐을 때 소설책을 읽었다.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놀라기도 했고, 묘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아했던 책인데 나한테 이런 제안이 오다니 이런 생각도 하고. 그냥 운명같이 느껴졌다.”

김도영 감독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했던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김도영 감독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했던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원작이 큰 에피소드나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영화적으로 구성할 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고민을 했나.
“원작은 신문 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삶이 허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담담한 문체로 르포처럼 구성돼있다. 그래서 더 많이 어필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문제는 영화로 만들 때 서사가 없다는 거다. 영화라는 건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하고, 따라가야 하는데 큰 서사가 없어서 고민이 있었다. 영화적 서사로 어떻게 만들 수 있고, 책을 읽었을 때 느낀 공감을 영화로 전해줘야 하는데 어떤 이야기로 관객과 만날 수 있을까.

다행히 초고가 있었는데, 가족들의 따뜻함이라든가 주변 인물의 선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이 담겨있었다. 초고에서 큰 서사를 따오고, 사회적 의제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작이 사회적 화두를 던지고 있지 않나. 그걸 어떻게 시나리오에 잘 깔아서 공명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고, 원작이 갖고 있는 가치를 절대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소설이 영화화되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소설과 비교를 당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소설과 같은 결,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가 목표였고, 그 안에서 능력 닿는 대로 내가 아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맘충’신이 영화에는 초반과 후반부에 담겼더라. 그렇게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소설이 어떤 이야기일까, 왜 조남주 작가님이 빙의라는 설정을 썼을까 고민을 했다. 빙의나 해리성 장애 등 병명을 붙일 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문학적인 상징으로 쓰인 게 아닌가 생각했다. 언어를 잃은 사람이, 자신의 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중심선을 잡고 나니까 밑을 채우는 서사가 보였다. 처음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갔던 여자가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빙의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영화상으로 클라이맥스에 놓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을 통해 지영이 성장해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결말이 좋았다. 다른 결말도 있었나.
“초고에서는 복직하는 걸로 돼있었고, 촬영도 두 개 다 했다. 복직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 복직하는 결말도 되게 좋다. 너무 아름답게 찍혔다. 그런데 결국 이것(글을 쓰는 것)을 택했던 것은 지영이 오롯이 혼자 엔딩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미적으로는 복직이 좋지만, 시각적으로 그녀가 혼자 그 엔딩을 맞으면 멋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원작 ‘82년생 김지영’에서 나온 두 개의 문장을 너무 쓰고 싶었다. 하하.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이면 어울리게 잘 녹아들어 가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소설과 달리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 더 좋았다.
“소설은 씁쓸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해도 좋지만, 극장을 나가는 순간 관객이 어떤 마음이면 좋을까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섰을 때 ‘그래도 나아지지 않겠어?’라는 마음을 품고 나갔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응원해주고 싶었고, 응원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가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판타지일 수 있지만, 그런 판타지를 그림으로써 오히려 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결말을 그렸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대현 역을 맡은 공유(왼쪽)과 지영으로 분한 정유미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82년생 김지영’에서 대현 역을 맡은 공유(왼쪽)과 지영으로 분한 정유미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젠더 이슈로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한데, 원작을 영화화하면서 그런 논란을 염두에 두고 연출한 부분도 있나. 예를 들어 대현의 분량을 늘린다든지,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더 담아낸다든지.
“그런 마음 전혀 없었다. 소설과 결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영한테 이입해서 따라가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뤄져야 했다. 이미 초고에서 대현은 그 정도의 비중이었다. 아니 조금 더 많은 비중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오히려 대현의 롤이 깎였다. 대신 더 섬세해졌다. 배역이 평면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소설에서 대현은 평범한 보통 남편이었고, 그렇게 그려지길 원했다. 지영의 병을 알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나온다. 이전에 활발하게 아내를 돕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알게 되기 때문에 ‘네가 나 때문에 아픈 것 같아’라는 얘기도 한다. 육아휴직을 시킬지 말지도 굉장히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대현도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손잡고 웃는 것 이상의 무엇으로 그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특정 캐릭터 때문에 지영이 아픈 게 아니라 어디에 몸담고 있는가, 우리의 풍경이 어떤지를 담고 싶었다. 사회 관습, 문화.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틀이 보이면 좋지 않을까. 소설과 마찬가지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져야 많은 분들이 생각해볼 수 있고, 생각의 여지들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남주 작가가 한 인터넷 방송에서 식초에 담긴 오이 이야기를 했다. ‘오이가 아무리 나는 훌륭한 오이라고 하더라도 식초에 담겨있으면 결국 피클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었다. 결국 우리가 어디에 몸담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같은 결을 담아내고 싶었고, 그런 마음으로 각색을 했다.”

-실제 경험이 담긴 에피소드도 있나.
“아이 데리고 출근한 워킹맘. 나도 그 경험이 있다. 한예종에 다닐 때였다. 아이가 수족구에 걸렸는데 전염병이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발표하는 날이라 (학교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는데, 속상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만 겪은 일은 아닐 거다. 수없이 많이 겪었다고 하더라. 유모차를 발로 미는 것도 그렇고, 아기 띠와 한 몸이 된 모습들. 육아의 경험은 많이 담겼다. 몰래카메라라든가 유리천정 같은 것은 책도 읽고, 주변 직장인 친구들의 이야기를 참고했다.”

김도영 감독이 연출 철학을 밝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김도영 감독이 연출 철학을 밝혔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여성 감독으로서 유리천정을 경험했거나 현장을 이끄는데 어려운 점을 느낀 적이 있나.
“여러 작품을 했으면 여자 감독으로서 어려웠다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큰 프로덕션은 처음이라 그런 점은 못느꼈다. 처음이라 낯설고 힘든 건 있었다. 운이 좋았다. 대표님도 여성이고 스태프들도 여성이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에 대해 동의한 분들이 함께 했고, 모두 조심했던 면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겪지 않았다 하더라도 영화계 많은 분들이 유리 천정을 경험하고 있을 거다. 언론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디에나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나. 저희들이 이런 영화를 만든 것도 그런 것들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관습이나 편견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나도 내가 어떤 풍경 속에 있는가를 봤던 순간들처럼, 우리 지영이들이 자신을 보는 순간이 됐으면 좋겠다. 보아야 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걸음 떨어져서 무엇이 문제인가 보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아주 명확하고 선명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를 보면서 주변 누군가가 생각이 나고 혹은 자기 스스로에게 응원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면 연출자로서 참 고맙겠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텐데, 연출을 하면서 꼭 지키고자 하는 다짐이나 신념이 있다면.
“잘난 척하지 않고 내가 아는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것. 이번에 만들면서 느낀 건데,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더라. 상업영화라면 상업적인 고려를 다른 분들이 같이 해주시기 때문에 균형을 잡을 수 있다. 혹은 독립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를 하게 되면 또 다른 환경에서 고민을 하게 될 거다. 다른 분들이 같이 충분히 같이 이야기가 될 거다. 상업성도 갖추고 작품성도 갖추고 이런 고민보다는 내가 관객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지, 어떤 시간들을 같이 체험하고 싶은지 등에 집중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어떤 영화를 만들든 처음 그 이야기가 싹틀 때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지 않나. 그 내면의 목소리를 잃지 않고 계속 귀 기울이는 감독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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