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벌써 낙엽이 한 잎 두 잎 바람에 휘날리는 스산한 늦가을이구먼. 눈을 감고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들을 하나 둘 떠올려도 좋은 계절이네. 오늘은 대한민국이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겪으면서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고.

이제는 도저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아름답던 삼천리강산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이미 허울만 남은 ‘염치’일세. 염치(廉恥)가 뭔가.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지. 맹자가 말한 ‘수오지심’이 바로 염치일세. 지금 우리들 사는 모습을 좀 냉소적으로 보자고. 우리 사회의 상위 20%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권력과 재력을 움켜쥐고 있는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말과 행동을 보게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 대다수가 부끄러움을 ‘잊고 잃은 지’꽤 오래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네. 그들의 위선적이고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들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도 기우(杞憂)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

그래서 그런지 정희성 시인의 <광장에서>라는 짧은 시가 얼른 눈에 띄더군.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별일 없었냐고 물었더니// 나는 문제 없어/ 나라가 걱정이지

10여 년 전 이 나라의 모든 문제들이 다 노무현 탓이었던 시절이 있었네. 지금 내 또래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노인들 사이에서는 모든 게 ‘문재인이 탓’일세. 어제 동네 공원에서 운동하던 노인들이 큰 소리로 '문재인이 때문에 나라 망했다'고 욕하면서 지나가더군. 그들에게 다가가 ‘나라’가 뭐고, '망했다'는 의미가 뭔지 물어보고 싶었네. 한 나라가 그렇게 쉽게 망할까? 어떤 나라가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망한다면 그게 나라이기나 했을까? 설사 대통령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할지라도 그게 대통령 혼자만의 잘못일까? 그런 불안전한 정치체제를 방치한 국민 모두, 아니‘문재인이 때문에 나라 망했다’고 큰소리로 떠드는 우리 노인 세대들의 잘못이 더 큰 것 아닌가. 어디를 가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나라 걱정하는 노인들 보면 괜히 내 마음 착잡하네.

내가 보기에 ‘나라 망한다’는 말은 분명 가짜뉴스일세. 종편에 나와 무책임하게 떠드는 가짜 지식인들에게 노인들이 속고 있는 거야. 대한민국은 쉽게 망하지 않네. 내 눈에는 예전에 비해 크게 잘못 되고 있는 게 별로 보이지 않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는지. 물론 변화 속도가 느려서 답답하기는 하지만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는 게 사실 아닐까. 지금 내 또래 노인들 대다수는 자신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네. 자신들이 지금 받는 있는 다양한 복지 혜택들이 언제 생겼는지도 잘 몰라. 당장 동네 병원에 가보라고. 대부분 나 같은 노인들이네. 전체 진료비의 40%가 노인 몫이라는 통계를 실감할 수 있지. 노인들이 국민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많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다고 나라가 쉽게 망하는 것을 아니지. 그런데도 왜 망한다고 걱정하는지…

나라는 언제 망할까? 누구나 남에게 빚지고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세상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경쟁보다 함께 사는 법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집안 배경이나 운이 남들보다 좋거나 열심히 일해서 세속적인 성공을 했을지라도 언제나 겸손하고 그 성공의 결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 돈의 가치보다는 사람과 생태를 더 중시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남들보다 운이 좋아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벌었거나 부동산 투기 등으로 부자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어느 나라든 쉽게 망하지 않네. 물론 반대로 이런 사람들이 극히 소수이거나 사라지면 어떤 사회든 오래 버티지 못하지. 한 마디로 말하면, 염치없는 사람들이 많으면 나라가 망하는 거여.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염치를 아는 건전한 보통 사람들이 더 많아. 그러니 노인들은 이제 나라 걱정 그만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 열심히 하다가, 또는 즐겁게 놀다가, 때가 오면 웃으면서 돌아갔으면 좋겠네만… 나라보다는 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해도 염치없다는 말을 듣지 않을 나이이거든.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