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며칠 전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이어령 선생 인터뷰가 길게 실렸다.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는 선생이 요구한 제목인 것 같았다. 연치(年齒)도 그런데다, 독한 병마의 습격을 받은 지도 여러 해째니 그런 주문을 했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항로를 비춰준 등대 하나가 멀어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인터뷰를 읽었다. 선생의 <흙 속에 바람 속에>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50여 년 전 어느 날 아버지가 처음 들여놓은 작은 책장에 입주한 첫 식구였다. 이 두 권과 <전쟁 데카메론>, <장군의 수염> 같은 선생의 후속 저작들은 문화와 문명, 요즘 말로 ‘인문학’으로 나를 인도했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비판하려는 마음에 시동을 걸어줬다.

선생의 사유와 그것이 담긴 저서들을 이러저러하다며 비판하는 학우들 사이에 끼어 간혹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내가 뭘 제대로 알고 그랬겠나, 그나마 선생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사유를 먹기 좋게 요리해서 내놓았기에 우리가 그렇게 비판할 수 있게 된 거라는 생각을 버린 적은 없었다.

나는 선생을 가까이서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선생께서 위원장을 맡았던 ‘새천년준비위원회’가 해산을 앞두고 있던 2000년 12월 말이었다. 새 천년의 첫 해가 저물어 가는데, 한국이 과연 “새 천년을 잘 맞았는지, 새 천년의 첫 해는 잘 보냈는지” 선생의 소회를 물으러 서울 통의동에 있던 새천년준비위원회를 찾아간 것이다. 그때 나는 한국일보 기자였다.

그때 인터뷰를 찾아내 다시 읽어보았다. “2000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심정이 어떠신지. 새천년준비위원장이시니 올해를 넘기는 소감은 또 다를 것 같습니다”라는 내 첫 질문에 선생은 “0자가 세 개 붙은 해를 다시 맞기 위해서는 앞으로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도 하늘의 별들이 내려앉은 것 같은 열두 달 전 광화문 거리의 장식등이 눈에 선하고 50만 시민들이 천년의 자정을 카운트다운 하던 함성이 귀에 선하다. …. 광화문 네거리에서 열린 새 천년 첫날 행사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누구나 정월 초하루에 일 년을 계획하듯 100년밖에 못사는 사람이 천년의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기회가 사회적 에너지로, 사회적 자본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됐다”고 답했다. 선생을 뵀던 시간은 오후 늦은 때여서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했다. 새 천년의 첫해도 덧없이 지나갔다는 생각 때문인지 여느 해 연말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새 천년을 맞으며 고조된 국민 분위기가 사회적 에너지로 이어지지 못한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라는 두 번째 질문에는 “새 천년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국민의 관심이 곧 바로 찾아온 국회 선거 등 현실적인 정치 문제로 쏠리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서울 올림픽 성공의 무드가 청문회 등 당시의 정치 쟁점으로 급랭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새천년준비위원회로서도 선거를 앞두고 이벤트성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칫하면 선거에 이용될 수 있었다”는 답이었다.

선생이 뒤이어 “하지만 희망과 사랑의 꿈은 달걀처럼 깨지기 쉽지만 껍질을 깨는 그 아픔 없이는 새 생명과 창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해 동안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았지만 남북공동성명과 이산가족의 만남 등, 지난 세기와는 다른 새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데서 위안을 찾는다. 비록 지금은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올 한해 벤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것도 새 세기에 대한 희망의 징조다”라고 말했다.

나는 올 2월에도 선생을 뵀다. 북한산 기슭 선생의 자택에서다. 은퇴한 외교관으로 제주도에 살면서 한국 문화와 제주도 발전을 위해 이 일 저 일 힘닿는 대로 애를 쓰고 있는 중형(仲兄, 정달호 전 이집트대사)이 그런 일로 연을 맺은 선생을 뵈러 가는 길에 ‘책 세 권을 낸 작가’인 나를 선생께 인사시킨다며 데려 갔다.

그날 선생은 환자 같지 않았다. 여전히 이것저것 많은 일들에 관심을 보였고, 새롭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펼쳐보였다. “예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나는 선생과 중형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잣이 곱게 박힌 곶감과 녹차를 마시면서 이중섭의 아이들 그림 등 벽과 마루에 놓인 그림과 골동품 따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선생은 그날 잘 익은 홍시 빛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이번 조선일보 인터뷰 사진에서도 선생은 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사진 속 선생은 그때보다 안색이 훨씬 나빠 보였다. 돌이켜보니 선생을 인터뷰했을 때 선생은 지금 내 나이였다. 선생은 그때 희망을 이야기했는데, 지금 나는 선생만큼 희망을 볼 수 없다. 내 눈이 선생만큼 밝지 못한 탓이리라.

글을 마치려는데 종교개혁시대의 위대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생각난다. 유럽의 왕과 귀족, 종교지도자와 학자들은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와 대화를 나누는 걸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고, 그에게서 편지를 받은 사람은 그 편지를 최고급 천에 싸서 보관하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걸 자랑으로 여겼다. 선생을 만난 사람 가운데도 그런 느낌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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