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영면에 들었다. /뉴시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영면에 들었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국내 산업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원조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자 ‘대우 신화’로 추앙받던 영광의 시절부터 IMF 이후 몰락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욕의 세월’을 돌아본다.

◇ ‘신화’가 지다

김우중 전 회장은 지난 9일 오후 11시 50분,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향년 83세.

김우중 전 회장은 지난해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12월 말부터 증세가 악화돼 이후 장기 입원 중인 상태였다. 다만, 평소 자신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는 받지 않았으며 1년여의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진행되며, 장지는 충남 태안군에 위치한 선명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 세계로 뻗어나간 대우, 영광의 시절

김우중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제4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김용하 씨이며, 김우중 전 회장은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시절 부친이 납북되면서 김우중 전 회장은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생계를 위해 신문배달과 장사를 겸하며 예사롭지 않은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60년 한성실업에 입사한 그는 본격적으로 ‘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성실업 시절인 1963년, 김우중 전 회장은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의 직수출을 성사시키며 주위를 놀라게 했고 1967년엔 아예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대우실업은 1969년 호주 시드니 지사를 설립하는 등 수출을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당시 국내 재계의 1세대 사업가들은 대부분 건설·제조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김우중 전 회장은 무역·수출을 근간으로 국내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2017년 대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의 모습. /뉴시스
2017년 대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의 모습. /뉴시스

1970~80년대 들어서부터는 본격적인 사업확장에 나섰다. 1973년 영진토건(대우개발), 1978년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1979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를 인수했고, 19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설립한 대우전자는 1980년 초 전자회사들을 인수하며 가전제품 제조회사로 거듭났다. 그렇게 대우그룹은 20여년 만에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를 향한 발걸음도 계속됐다. 1970년대부터 일찌감치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해 터를 닦기도 했던 그는,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이 몰락하자 ‘세계경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나섰다. 그렇게 대우는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남미 등 당시로선 더욱 낯설었던 나라에 적극 진출했다. 그의 이러한 경영철학은 1989년 발간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고스란히 담겼는데, 이 책은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리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대우그룹은 1990년대 후반 41개 계열사와 600여개의 해외법인 및 지사망을 갖춘 재계 2위 대기업그룹으로 발돋움했다. 국내고용만 10만명, 해외고용은 25만명에 달했고, 무려 21개 해외국가에서 현지화 전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1998년 기준 자산총액은 무려 76조7,000억원, 매출액은 91조원에 달했다.

◇ 외환위기 직격탄에 몰락

하지만 이 같은 고속성장은 몰락도 순식간에 이뤄졌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덮친 외환위기로 가장 큰 직격탄을 맞았다. 가파른 성장으로 차입금 규모 또한 날로 커졌는데,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타격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쳤지만 끝내 1999년 그룹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몰락의 과정에서 21조원대 분식회계, 9조원대 사기대출 등의 혐의까지 받게 된 김우중 전 회장은 1999년 이후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채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5년 입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고, 징역 8년 6개월에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았다. 다만,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고 이후 주로 베트남 등 해외에 거주해왔다.

종국에는 몰락한 사업가가 됐지만, 김우중 전 회장은 노년에도 뜨거운 열정을 잃지 않았다. 2010년 이후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GYBM)에 착수해 동남아 지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키워냈다.

2014년엔 회고록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과의 대화’를 발간했는데, 여기서 대우그룹 해체 당시 정부와의 갈등을 언급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지막 공식행사 참석은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식’으로 남게 됐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