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정숭호 ▲언론인 ▲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정부 공인 노인’이 된 지 3년밖에 안 된지라 지하철에 앉아 있는 내 앞에 나보다 나이 많은 ‘진짜 노인’이 다가오면 불편하다. 그럴 땐 열에 여덟, 아홉 번은 일어난다. 마음 불편한 게 다리 아픈 거보다 훨씬 더 불편하다. 시간 많은 백수여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녀 버릇하고, 다리 근력 유지하는 데 좋다는 ‘스쿼트’를 자주한 덕에 한 시간쯤은 서서 갈 체력은 되는 게 다행이다.

그날도 그랬다. 환승역에서 여러 사람이 우르르 올라탔다. 나보다 두세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누님’ 두 분이 내 앞에 섰다. 내 앞에 서고 싶어 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떠밀려 왔거나, 서 있더라도 편한 곳, 손잡이라도 쉽게 잡을 곳을 찾아 온 거다. 생각할 거 없다. 그냥 일어서며 여기 앉으라고 했다. ‘누님’들은 서로 “네가 앉아라” 하더니 하나는 앉고 하나는 손잡이에 매달렸다. 그때까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눈길 한 번도 안 줬다. 자기들끼리 하던 대화를 계속한다. 교양이 있어 보이는 차림새라 괘씸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러나 어쩌랴, “내 자리 돌리도!”라고 할 거냐, 괘씸해도 그냥 가야지.

다음 정거장을 지나자 반전이 일어났다. 누님들은 내가 그 정거장에서 내리는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기들끼리 “어마, 안 내리셨네. 우리 앉으라고 양보해주신 거네”라고 주고받더니 바로 옆에 빈자리가 생기자 나더러 앉으라고 한다. 내가 앉을 리가 없지. 친구 먼저 앉히고 자기는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누님에게 앉으라고 했더니 잠깐 머뭇하다가 앉는다. 그 누님은 내 등 뒤 건너편에 빈자리가 생기자 “저 분 내리시네. 저기 앉으세요”라며 최선을 다해 미안해한다. 앉을 생각이 없는 나는 괘씸하다고 생각한 게 미안해 살짝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 후 그냥 서서 버틴다.

누님들과 내가 실천한 미풍양속이 누님들 왼쪽 옆자리에 묵직하게 앉아있던 50대 사나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 저쪽으로 몇 발짝 비켜난다. 누님들은 또 나더러 앉으라고 한다. 나는 또 살짝 웃으며 “곧 내립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고개를 돌린다. 잠시 비었던 그 자리는 다음 역에서 탄, 배가 불룩할 정도로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든 40대 여인이 차지했다. 이제는 침묵이다. 모든 게 정리됐다. 누님들과 나 사이 교류는 끝났다. 누님들은 자기들끼리 대화에 빠졌고 나는 심심해서 전화기를 꺼내 새 소식이 없나, 카톡방을 들여다본다.

내릴 때가 됐다. 문 앞으로 옮겨 가는데 누님들이 “사장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뒤에서 합창한다. 이제는 내가 감동이다. 그깟 자리 한번 비켜준 걸 저렇게 오래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 그날 처음 봤다. 나도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고 내렸다.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환승을 하려고 걸어가는데, 또 다른 누님이 환승통로에서 20대 청년에게 “이리로 가면 종각인가요?”라고 묻고 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누님은 다른 청년에게 다가가 같은 걸 또 묻는다. 여전히 깔끔한 대답을 듣지 못한 듯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한다. 할머니 손을 잡고 있던 예닐곱 살짜리 손녀도 표정이 불안하다. 두 누님의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된 내가 나선다. 나는 며칠 전 여기서 환승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종각 가시려면 반대편으로 가야 해요”라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 누님은 고맙다고 말하고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해야지”라며 손녀에게 배꼽인사를 시킨 후 반대편 계단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럽쇼, 이게 종각 가는 길이네. 이게 종로5가 가는 길이 왜 아니지? 내가 무슨 착각을 한 거냐! 또 거꾸로 갈 뻔 했잖아!” 자책도 잠깐, 그 누님과 손녀가 생각 나 올라왔던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지만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런, 왜 이리 미안하냐. 그 누님,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영감탱이, 모르면 가만있지. 왜 나서서 손녀까지 힘들게 헛걸음 시키냐. 그렇게 늙어 보이지도 않던데…”라는 원망이 오랫동안 들려왔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일일일선(一日一善)’은 “착한 일은 하루에 하나씩만 해라”라는 뜻이었나?

(스쿼트는 ‘앉았다 일어서기’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스쿼트를 매일 ‘열다섯 번씩 세 세트’를 하면 다리에 근육이 붙어 자세가 바로 잡히고 나이 들어도 제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열다섯 번씩 세 세트’라 함은, 앉았다 일어서기를 마흔다섯 번 하되, 열다섯 번씩 세 차례 하라는 뜻이다. 아침에 TV리모컨을 여기저기 누르다보면 어디에선가는 보여주는 헬스 프로그램에서 배웠다. 시간과 돈 안 드는 건강법이라고 해서 종종 따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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