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내가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천양희 시인의 <1년>일세. 기해년 시작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시인의 말처럼 1년이 ‘후딱’ 가버렸네. 흔히 세월은 나이 속도로 달린다고 말하지만 체감 속도는 더 빠른 것 같아. 게다가 가속도까지 붙으니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자니 크게 다칠 것 같고. 그래서 ‘어허’ 하다 보니 내일 모레가 경자년(庚子年)이야.

그래도 황금돼지띠였던 2019년은 나에게 의미 있는 한 해였네.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노인’이 된 해였거든. ‘진짜 노인’이 되니 좋은 것도 많더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식물원, 박물관, 미술관 등 모두가 무료입장이고,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시설들은 얼마간의 할인 혜택이 있어서 좋아. 지하철도 공짜고, 나보다 더 나이 드신 분들이 없으면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노약자석에 앉아 갈 수 있어서 흐뭇해. 사회적으로 대접 받는 기분이 들었어.

올해는 또한 사진에 푹 빠져 지낸 한 해였네. 거의 1년 동안 집 근처에 있는 도림천에 나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지. 그렇게 찍은 사진 60장을 골라 <도림천 노인들>과 <도림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2개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했어. 이제 누가 뭣을 찍고 있냐고 물으면 그 포트폴리오들을 보여줄 거야. 내년 봄에는 도림천 사진집도 발간할 예정이네. 책만 읽던 사람이 나이 들어 뭔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 변화인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꿈>이라는 시에서 ‘글을 쓸 때’, ‘바느질할 때’, ‘풀을 뽑고 씨앗을 뿌릴 때’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듯이 난 올 한 해 사진을 찍으면서 늘 살아 있음을 실감했네.

뒤돌아보면, 5년 전 예순 살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던 게 내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노년에 사진만큼 좋은 취미도 없는 것 같아.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취미가 사진찍기야. 그래서 다른 쓸데없는 생각들을 않게 되어 좋아. 나이 들면서 추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처음부터 뭔가 큰 성과를 기대하고 시작했던 일이 아니어서 더 좋은 것 같네. 뭐든 욕심을 내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거든. 그러면 사진 찍는 게 짐이 되고 말지. 무슨 일이든 즐거움이 없으면 그건 고역이고 소외야.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오래 할 수 있어.

물론 2019년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 아닐세. 올해는 내가 육체적으로 노쇠해지고 있음을 실감한 한 해이기도 했네. 나이를 먹으면 기능이 약해지거나 고장 나는 기관들이 많아. 지난 50여 년 동안 마신 술 때문인지 몰라도 요즘 소화능력이 떨어져 좀 우울하네. 그래서 좋아하던 술을 끊고 먹고 싶은 것들을 보고만 있는 시간이 많아져 약간 서러운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신체 기능이 약해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군. 적은 양의 음식을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씹게 되니 이전에 모르던 맛도 알게 되어서 좋아. 술을 끊으니 책 읽고 사진 찍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좋고.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의 참뜻을 알아가고 있네.

예순 살이 되던 해 설날 아침에 자네에게 썼던 편지에서 인용했던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내 인생에서 2019년은 그 시에서 노인이 말했던 “참삶의 나이”를 먹은 행복한 한 해였네.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라고 혼자 좋아하던 날이 많았어. 모레부터 시작하는 2020년에도 그런 날들이 많게 노력할 거야.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그냥 의미 없이 허송세월 하면서 보내지 않을 걸세. 언제나 지금이 가장 적은 나이라고 생각하면서 젊고 씩씩하게 살 거야. 다시는 66살이란 나이를 가질 수는 없으니까.

브라질 시인인 마샤 메데이로스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에서 경계했었지.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결코 일상을 바꾸지 않는 사람/ 위험을 무릎 쓰고 옷 색깔을 바꾸지 않는 사람/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 가는 사람이다.”맞는 말이야. 숨을 쉬고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닐세. 제대로 살기 위해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네. 잭 런던이 죽기 얼마 전에 친구들에게 유언처럼 남겼던 말처럼, “인간의 본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란 걸 잊지 말게.

새해에도 아침마다 시를 읽고, 하루 종일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주기적으로 가고 싶은 곳 찾아 여행을 떠나고, 날마다 사진과 함께하는 삶을 계속할 거야. 구상 시인처럼,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不滅)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다가 춤을 추며 떠나갈 걸세. 삶이든 죽음이든 즐겁지 않으면 의미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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