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성찰배경: 2019년 한 해를 돌아보니, 종교계를 포함해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들이 제기될 때마다 마련된 개선책들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거의 좁은 안목에서 나온 임시미봉책인 것 같습니다. 필자의 전공과도 관련된 ‘탈원전’ 문제를 보기로 들면 필자 역시 탈원전 원칙은 대찬성입니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을 직시하며 모든 관련 여건들을 면밀히 검토하며 속도조절이 관건인데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보유했던 한국의 상황은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자의 견해로는 가장 안전한 핵융합발전이 가능해지는 시기에 맞추어 탈원전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아울러 안전한 원전해체 기술까지 보유한다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경제적 유발 효과를 포함해 두루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한편 지난번에 종교에 초점을 맞추어 기고했던 졸고에서 서강대 길희성 명예교수의 저서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운데 ‘영성(靈性)적 인간 배출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비단 종교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제들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인간들이 일으키는 일이기에 우리 모두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적성이 맞는 직업을 택해 온몸을 던져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함께 더불어 영성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주로 쓰고 있는 ‘영성’과 동등하면서도 종교를 초월해 써도 무방한 ‘신령스러운 기틀’을 뜻하는 ‘영기(靈機)’란 선어(禪語)에 대해 두루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 영기단련의 목적

대체로 영성 회복을 위한 선수행, 즉 영기단련의 목적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상구보리(上求菩堤)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풀어쓰자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해방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모두 함께 겪었던,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키워야 할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의 현실과는 괴리된 이론에 치우친 어설픈 사회참여, 입시부정 및 연구비 유용,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법을 다루어야 할 법조계 인사들의 치우침, 나라의 건전한 경제 성장에 기여해야 할 재벌들의 불공정 행위, 민주복지사회 건설에 앞장서야 할 정치인들의 편 가르기 등을 통한 정권 다툼,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부정부패 및 직업화된 종교인들의 타락 등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원칙과 일관성이 결여된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세상은 N포 세대들을 양상하며 점점 더 혼탁해져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대개는 특정 계층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탓인 것이며,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든다 하여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소용없는 일이기에 이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각자 나름대로 지속적인 영기단련을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바르게 닦는 일이며, 이외에는 따로 묘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깊이 통찰해 보면 우리 모두 닦아져 가고 있는 마음, 즉 영기단련을 바탕으로 자기가 맡은 그 자리에서 전문적 기질을 100% 유감없이 발휘할 때, 즉 무분별(無分別) 지혜가 대활약할 때, 있는 그 자리가 헬조선이 아닌 바로 극락이고 천당이겠지요.

◇ 십우도(十牛圖)

그런데 지속적으로 영기단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종교를 초월해 반드시 각자 코드가 맞는 수행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필자가 40여 년 간 이어온 선수행의 경우를 보기로 들겠습니다. 오늘날 교통수단의 발달로 주말의 짧은 여유를 이용해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손쉽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유서 깊은 명찰(名刹)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들 법당 벽에는 대개 열 폭의 소 관련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잃어버린 참나’를 ‘소’에 비유해 그 소를 찾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그린 ‘십우도[또는 심우도(尋牛圖)]’입니다. 한편 이 그림과 관련되어 북송 시대 곽암사원(廓庵師遠) 선사가 저술한 <십우도>는 깨달음을 대전제로 삼는 선불교의 수행과정과 참뜻을 그림과 게송으로 도식화시킨 독보적인 선문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동서양의 영적 스승들이 널리 활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 구성은 선 수행의 단계를 열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마다 각각 1개의 그림을 그리고, 각각에 적절한 소제목을 붙인 뒤, 서(序)와 곽암 선사가 지은 송(頌)과 다른 선사들이 지은 화(和) 및 우(又)로 이루어져 있는데 열 폭으로 이루어진 그림의 제목과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심우(尋牛): 잃어버린 소[참본성]를 찾으러 떠나는 목동[수행자]이 보인다./ 제2견적(見跡): 소는 보이지 않으나, 소의 발자국이 보인다./ 제3견우(見牛):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소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제4득우(得牛): 소를 잡아 코를 꿰었으나, 아직 소에게 야성(野性)이 남아 있다./ 제5목우(牧牛): 고삐를 단단히 잡고 소를 길들이는 모습이다./ 제6기우귀가(騎牛歸家): 온순해진 소를 타고 풀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제7망우존인(忘牛存人): 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동만 보인다./ 제8인우구망(人牛俱忘): 목동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고 일원상(一圓相)만 보인다./ 제9반본환원(返本還源): 새들이 지저귀고 복사꽃이 활짝 핀 풍경이 보인다./ 제10입전수수(入廛垂手): 저잣거리로 들어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며 웃음꽃을 피게 하는 포대화상[보살(菩薩)]이 보인다.”

◇ 영기(靈機)

필자의 견해로는 곽암 선사께서 적지 않은 수행자들이 공안투과(公案透過)에 집착하다 수행의 본래 목적을 놓치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십우도>를 저술했다고 생각되며, 수행자가 이를 수행지도로 삼을 경우 마지막 열 번째 단계인 ‘입전수수’, 즉 돕는다는 분별조차 없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지혜의 활작용(活作用)을 목표로 바른 수행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특히 아홉 번째 단계인 ‘본원으로 돌아감’을 뜻하는 ‘반본환원’의 영적 체험이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석고희이(石鼓希夷) 화상이 이 점에 주목해 ‘영기’란 선어를 드러내며 다음과 같은 화답송을 붙인 것으로 사려됩니다.

“신령한 기틀은 유무의 공에 떨어지지 않으면서도[영기불타유무공(靈機不墮有無功)]/ 무심히 빛깔도 보고 소리도 듣는데, 어찌 장님이나 귀머거리이겠는가![견색문성기용롱(見色聞聲豈用聾)]/ 어젯밤 태양이 날아서 바다로 들어가더니[작야금오비입해(昨夜金烏飛入海)]/ 오늘 새벽하늘에 여전히 둥근 해가 붉게 떠오르네.[효천의구일륜홍(曉天依舊一輪紅)]”

참고로 ‘영기’에 대해 좀 더 부연설명 드리면 우리들 모두 갖추고 있는 참 본성의 신령(神靈)스러우면서도 오묘(奧妙)한 작용을 일컫는 말입니다. 스승인 종달(宗達) 선사께서는 이에 대해 “이는 유무(有無)라든지 미오(迷悟) 등을 초월한 때다. ‘무(無)’에도 치우치지 않고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으므로 유무의 ‘공(空)’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선(禪)’은 닦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공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그것을 경계한 말이다. 요는 유무를 초월하여 ‘무’라느니 ‘유’라느니 하는 이원적 분별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영묘(靈妙)한 활동이 가능하다. 덧붙여 ‘어제 저녁 태양이 바다에 들어갔다’는 것은 ‘무’를 가리킨 말이고 ‘오늘 새벽 해가 여전히 한 폭의 붉은 꽃처럼 피어났다’는 것은 ‘유’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하면서 자전하기 때문에 태양이 없어졌다가 다시 비추는 것이고 태양 자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밤이 캄캄하니 가정해서 ‘무’라고 했고 해가 솟아 밝으면 ‘유’라고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태양은 유와 무를 모두 절(絶)한 본래의 자기를 뜻하는 말이다.”

◇ 영성에 눈뜬 수강생

사실 영성의 길은 앞서 간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있는 그 자리에서 주위 분들에게 자연스레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자유가 아닌 방종을 만끽하다 결국 방황하는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더 ‘영성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서, 전공을 불문하고 강의 시간에 가끔 ‘향상일로’ 칼럼에 기고한 성찰글들을 포함해 자기성찰에 도움을 주는 일화들을 언급하곤 합니다.

보기를 들면 최근 수강생들의 성적을 내기 위해 60여명의 기말답지를 채점하는 과정에서 감사의 뜻을 전한 몇몇 수강생들이 필자로 하여금 크게 보람을 느끼게 했는데 그 가운데 ‘영성의 길’에 눈뜨며 쓴 반성문 하나를 발췌해 소개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험지를 백지로 낸다는 점에 대해 미리 사과의 말씀 올리겠습니다. 중간고사 성적이 기대치보다 낮게 나왔고, 생활 습관 역시 나태해져 일찌감치 재수강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끼고 갑니다. 2학기 초 저는 잠시 술과 주식에 빠져 살았습니다. 지난 1학기에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공부만 하며 지냈기에, 학점 4점대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스트레스 역시 많았습니다. 그래서 2학기는 약간은 느슨한 태도로, 친구들과 노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무렵 처음 접한 주식 역시 ‘쉽게 버는 돈’이란 유혹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랬던 저에게 수업시간 중 가끔씩 해주셨던 수업 외의 자기성찰에 관한 이야기들은 제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진행한 백만장자에 관한 실험 내용을 통해 저는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꿈, 포부 역시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1월 말에 있었던 학과 학술제를 계기로, 저는 더 구체적인 진로를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졸업 후 미국 대학원 유학, 혹은 국내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떠나려고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2학기가 아닌 1학기처럼 대학생활을 이어 나가야겠지만, 이것이 제가 행복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안목을 넓혀주시고 깨달음을 주시었기에, 이렇게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백만장자 실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주는 핵심 교훈은 ‘영기단련’을 병행하며 자신의 꿈을 쫓아 신바람 나게 인생을 살 경우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의과대학 연구팀이 1920년대에 아이비리그 명문대 졸업 예정자 1,500명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그 핵심내용은 졸업과 동시에 삶의 목표가 백만장자가 되려는 학생이 1,250여명이고 돈보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학생이 250여명이었는데, 졸업 후 수십 년 간 추적조사 후 얻은 결과 백만장자가 101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꿈을 따라간 250명 가운데 100명이, 돈만을 좇은 1,250명 가운데 단 1명만이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 2020년 새해를 맞이하며 늘 순수한 ‘영성(靈性)’ 회복의 노력, 즉 영기단련 없이 벌이는 거의 모든 일들은 이해득실에 얽혀 사심(私心)없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킨다는 점을 함께 가슴 깊이 새기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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